2019年11月19日火曜日

서울 여행기 2019.6.4~6.7

   서울 여행기  2019.6.4~6.7


  이번 서울 여행의 목적은 한국하고 친선을 지향하는 것이 중심이고, 거기에 실천적인 한국말 학습이라는 목적도 있었다.

  이 두 목적은 서로 관련하고 있고 제 언어 능력이 떨어지니까 이번 성과는 둘 다 불충분한 것밖에 아닌 결과가 됐지만, 그건 처음부터 알았다.  하지만 대략적인 느낌을 실감할 수 있었던 것이 그나마 성과일까?


첫날 6월 4일 (화)

  김포 공항 세관을 통과하고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서로 붙어 나란히 있는 두 은행의 환전소에 앉아 쾌활한 소리로 손님을 당기는 젊은 여자들이었다.  저는 그 두 소리에 맞춰 좌우로 흔들렸지만, 결국 오른쪽의  창구에서 만 엔을 환전하기로 결정했다.

  다음은 안내소의 일본어 카운터에서 처음에는 한국어로, 한국어로 말할 수 없는 것은 일본어로, T-money 카드를 어디에서 살 수 있는지 물어봤다.  3층으로 돌아가거나 지하철역의 입구 주변에서 살 수 있다고 해서 지하철로 향했다. 
  첫 양품점에 들어가서 T-money 카드를 어디서 구입할 수 있는지 물었는데 취급하지 않는다도 할뿐, 어디에서 구입할 수 있는지 가르쳐 주시지 않았다.  이게 한국인의 일본인에 대한 태도인지 생각하고 조금 실망했다.

  매표기가 보여서 조금 만져봤다.

  다음은 소리를 높이면서 식료품을 팔고 있는 젊은 여자에게 물어봤지만 내 한국어가 통하지 않는 것 같았다.  다음은 그여자가 스마트 폰으로 일본어에 번역하는데 그 일본어를 몰랐다.  그럭저럭 이야기하는 사이에 사정을 이해한 것 같은데 그 여자가 건너편 세븐 일레븐을 가리켰다.  나도 이렇게 근처에 편의점이 있는 것을 가리켜줄 때까지 몰랐다.  편의점에 파는 것은 이전부터 나도 알았다.

  세븐일레븐에서 T-money 카드를 샀다.  이건 현금만 될뿐 카드를쓸 수 없는 것 같다.  T-money 카드 충전도 현금으로만 가능하다.  역시 캐시가 필요하다.  T-money 카드에 매표기로 충전했다.  이것은 일본어,중국어, 영어로도 되어 있었다.

  다음은 지하철.  어느 쪽으로 가면 되는지가 문제였다.  입구가 하나 밖에 보이지 않았다.  불안한 기분에 휩싸이면서 플랫폼에 내려가서 줄을 선 젊은 여자에게 물어봤다.  "이 지하철 종로3가에 가요?"  그러자 "네"라는 대답이 와서 한숨 돌렸다.  나중에 잘 보니까 플랫폼의 타는 곳 위에 다음 정차 역하고 진행방향이 화살표로 적혀 있었다.  그리고 플랫폼에 내려가기 전에 양쪽 플랫폼이있으면 행선지하고 화살표가 적혀 있으니까 그걸 보면 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종로3가에서 내렸다.  밤 8 시라고 하는데 동네에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포장마차가 여기저기에 줄을 짓고 있었다.  식당도 여기저기에 있었다.  그런데 호텔은 어느 쪽이지?  여기서 쓸모가 있는 건 뭐니뭐니해도 지도와 실버 나침반이었다.  산행했을 때 실버 나침반의 사용법을 배운 것이 이와 같은 도시에서도 쓸모가 있다.  지도위에서 진행할 방향을 정하고 목적지로 향하는 골목길을 알아내서 천천히 걸으니 호텔이 어둠 속에서 나타났다.  사전 설명과 같이 호텔 밑에 편의점이 있었다.

  "안녕하세요?" 냐고 했는데 프론트의 남자는 일본어로 응대했다.  호텔의 편의점에서 내일 아침으로 샌드위치와 우유를 사고 돌아와 프론트의 여자에게 "이 근처에 슈퍼마캣이 있어요?" 라고 물으니까 이번에는 한국어로잘 못 들었지만 "오른쪽으로 가서 횡단보도를 건너시면 있어요" 라고 비슷하게 뭐라고말한 것 같았다.  다음날 아침에 가보니까  조금 작지만 확실히 슈퍼마켓이 있었다.  하지만 아침 이른 시간이라서 아직 가게 문을 열지 않았다.


6월 5일 (수)

  아침 운동을 겸해서 탑골 삼일 기념 공원에 가보기로 했다.  이번에도 역시실버 나침반이 쓸모가 있었다.  공원 안에는 아침 아홉시까지는 못 들어가서 안의 상황을 담을 넘어 보거나 설명 문장을 읽거나 했다.

  여기서 한국 현실을 알았다.  일본에서도 있는 일이지만 일이 없는 노인들이 이 공원 주변으로 많이 모이고 있었다.  안에는 장기를 두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조금 이상한 광경이었지만 친구하고 사이좋게 하는 것 같았다.  여기 뿐만 아니라 한국 사람들은 친구들끼리 사이가 좋은 것 같다.  식당에서도 거의가 그룹 손님이고 친구끼리 사이좋게 이야기에 열중해 있고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은 별로 안 보인다.

  일이 없는 사람은 여기 뿐만 아니라 큰 대로 사거리에 있는 큰 나무 아래에도 있고 그것과 종류가 다르지만 저녁이 되면 융단을 보도에 깔고 야시장을 여는 사람들도 많다.

  호텔에 돌아와서 아침을 끝내고 잠깐 쉬고 인사동 길을 걸어서 일본 대사관에 가려고 했다.

  인사동 길이 아름다웠다.  옷이나 미술품을 취급하는 가게가 많다.

  두 지구 사이이기 때문에 지도에 없는 곳이 있어서 일본 대사관 앞 대로를 못 찾고 이상하다고 생각해서 되돌아왔다.  드디어 일본 대사관 앞 그위안부 상을 발견했다.  열두 시가 안 됐지만 벌써 삼 사 인 초로의 남녀가일본 대사관를 향해서 항의 소리를 질렀다.  무슨 말을 하는지 그 말을 알 수없는 게 유감스러웠다.  다음에는 더 공부해서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오 려고 했다.  위안부 상과같이 아이 사진을 찍고 있었던 여자에게 "찍어 주세요." 라고 해서 저도 위안부 상과 같이 기념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그 여자하고 근처에 있었던 느낌이 좋은 초로의 남자에게도 제가 이전에 준비하고 가져온 원래 위안부 할머니께 드리는 메시지를 줬다.

  집회는 열두 시에 여는데 중학생들이나 고등학생들이 여기저기에서 모이기 시작했다.  너무 더워서 열두 시까지 근처의 스타벅스에서 감깐 쉬었다.

  나올 때 집회가 벌써 시작됐다.  위안부 할머니로 여겨지는 여성도 무대에오르고 중년쯤 되는 여성이 그 할머니를 청중에게 소개하는 것 같았다.

  할머니께서 퇴장했을 때 마찬가지로 중년 여성이 기합이 든 연설을 시작했다.   그리고 연설의 마지막쯤 듣고 있던 중학생과 고등학생이 의기 투합해서 한쪽에서 중학생과 고교생의 일부가 준비한 플래카드를 연설한는 여성의 구호에 맞추어 높이 내걸었다.  그렇게 지시하는 연설도 청중 옆에 있었다.  이야기를 모르고 대강 분위기를 이해하고 게다가너무 더워서 마지막까지 같이 있지 않고 그곳을 떠났다.  이것이 내 이번 여행 목적이니까 최후까지 머물러야 했는지도 모르겠다.

  근처에 있는 광화문 주변을 걷는 왕조 시대의 행렬을 보고 그 안에 있는박물관을 보고 지하철 5호선으로 호텔로 돌아와서 잠깐 쉬었다.

  오후 2 시 쯤부터 이번에는 낙산공원에서 서울 시내를 내려다 보려고 호텔에서 걸어서 낙산공원으러 향했다.  지도에서 봤을 때는 별로 멀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예상 이상으로 멀어서 피곤했다.  도중에 또 두 지구 사이에 지도가 끊어진 곳이 있는데 대학로에 도착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서울대학 병원이었다.  병원 대지를 통과해서 대학로를 건넜더니 점점 오르막길이 나와서 도중의 아름다운 카페를 통과해서 조금 버티니까 마침내 정상에 도착했다.  여기는 서울시내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이지만, 아쉽게도 대기 오염으로 높은 서울 타워나 가까운 북한산이 희미해서 흥이 깨졌다.

  피곤해져서 돌아올 때는 지하철을 타고 돌아오기로 결정했다.  4호선에서 1호선으로 갈아타고 종로3가에 도착했다.  도중에 동대문에 하차해서 청계천의 분수를 구경했다.  종로3가 가까운 대로 보도에서는 일찍 부터 야시장을 열려고 하는 노점상 사람들이 융단을 깔아서 상품을 나란히하고 있다.


6월6일(목)

아침 산책으로 1987년 독재 정치부터 해방 운동의 거점이었던 명동 가톨릭 성당에 갈 결심을 했다.  인사동 4길하고 5길을 걸어서 내려가면 의외로가까웠다.  하지만 사실 한시간 반이 걸렸다.  여기서도 실버 컴퍼스가 도움이 되었다.  아침 일찍이지만 성당 안에는 조용히 앉아서 무엇인지 모르지만 기도를 올리는 사람들이 있다.

호텔에 돌아와서 잠깐 쉬고 오늘 주된 일인 나눔의 집에 갈 결심을 했다.  13 시가 약속이였다.  한 시간 반 걸린다고 들어서 열 시에 출발했다.  지하철 3 호선 전철 안에서 제 좌우 옆에 앉은 중년 남자가 말을 걸었다.  제가지하철 지도를 펼쳐서 두리번두리번 지금 있는 곳을 확인하고 있었으니?   "어디서 내리세요?" 라고 물었다.  내가 하차할 역이나 오늘 목적지가 나눔의 집이라고 설명했더니 악수를 청해 왔다.  나는 헤어질 때 준비한 메시지를 줬다.

  나눔의 집은 경기광주 역에서 택시로 이십 분이고 요금이 천엔 쯤이었다.  나눔의 집에서 벌써 메일로 군마 다카사키의 Y 씨가 있는 걸 알았다.  Y 씨하고 위안부 문제 관련의 이야기를 하고 집 안을 견학하고 설명을 들었다.

  나눔의 집을 찾는 사람의 나라 안에서 제일 많은 나라는 일본이고 다음은미국이라고 했다.  그리고 서울 정대협은 그리스도쿄계이고 나눔의 집은 불교계라고 했다.  둘 다 1987년의 민주화 운동하고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

  할머니들은 국제 공청회 한국의 이미경 씨의 보고에서도 있는데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않은 사람이 태반이고 즉 한글을 못 읽는다.  그래서 그림을그려서 자기가 말하고 싶은 것을 표현한다고 했다.  그 그림 안에 몇 가지 쇼킹한 것이 있었다.  하나는 전염병 티푸스에 걸린 위안부들이 구덩이 안으로 떨어뜨려 불을 질렀는데 두 사람만이 조선병이 구해 줘서 도망치고 있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화가 셔와 일왕에게 대하고 셔와 일왕을 총사하는 그림이다.

  할머니하고 같이 저녁을 먹지 않겠냐고 하셨지만 늦었고 오늘은 저녁부터 비가 온다고 했는데 비가 벌써 한 반을 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면 할머니께 만난 후에 돌아가면 어떻냐고 하셔서 만나러 갔다.

  그 날에는 건강한 할머니들 3분은 어딘지 이벤트에 나가신 것 같고 몸져누워 노인성 치매이신 두 할머니들을 만났다.  이곳은 간호 시설이다.

  볼런티어이고 필리핀 출신의 캐나다 사람 젊은 여자 봉사자가 부지런히 할머니를 보살폈다.  제가 준비한 메시지를 꺼내고 "죄송합니다.  건강과 행복을 기원합니다" 러고 말했지만 통하지 않는 것 같아서 필리핀 여자가 제 말을 짧게 요약해서 알기 쉽게 말해줐다.  그리고 Y 씨도 이 사람은 일본에서 왔는데요라고 저를 소개했는데 통하는지 명확하지 않았다.  다른 한국 사람인것 같은 중년 여성이 내게 개러멜 같은 마실 것을 내줬다.  헤어질때 할머니께서 "사요나라" 라고 말씀하셨는데 깜짝 놀랐다.  이해하셨다.  저는 다시 다가가서 뭘 했는지 기억하지 않지만 뭔가 할머니께 말하고 헤어졌다.  "안녕히 계세요"이었으려나?

  Y 씨가 택시를 불러줘서 곧 근처에 있던 택시가 와서 타고 경기광주역에 도착했다.  이번 여행의 주요한 행사가 끝났다.

  호텔에 도착하고 지금까지 언제나 샌드위치나 주먹밥만 먹었는데 호텔 앞식당에 들어가서 쇠고기가 들어 있는 우동을 먹었다.  그 이름은 쇠고기국수라고 했다.  카드로 지불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왜 그런지 기계가 맞지않은지 "안 된다" 고 해서 현금으로 지불했다.  이것은 경기광주역 근처에 있던 편의점에서 일어났다.

  어제도 오늘도 일본대사관 앞에서 어제 제가 메시지를 준 남자한테서메일이 왔다.  사전이 없으니까 인터넷으로 찾으면 찾을 수 있지만 피곤해서 답장을 쓸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답장은 돌아와서 6월 9일일요일 밤에 써서 바로 보냈다.


6월 7일 (금)

  "체크아웃 하겠습니다."  호텔 프런트의 여자에게 남은 오렌지를 줬다.  "다 못 먹어요" 라고 하면서.

  김포공항 면세점 안에 있는 선물 가게의 아주머니들의 기운찬 권유와 설명을 듣고 일단 냉각할 시간을 갖고 앉아서 인터넷으로 알아밨는데 (공항이나 지하철에서 와이파이가 통한다.  하지만 라인로 송신하기에 실패했다.) 결국 고추장을 11미국 달러로 사기로 결정했다.

  하네다에서 얼굴인증용인 경마 게이트와 같은 것 밖에 보이지 않아서 거기로 들어갔다.  다음 번에 이것이 괜찮은지 근처에 있던 중년 여자 출입국 담당관에게 물었더니 그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않고 빨리 건너편으로 물러가 라고 건방지게 말해서 일본 경찰관은 무섭다고 생각했다.

  이상이 서울 여행기인데 한국에서는 민주주의를 쟁취한훌륭한 역사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그런 것 같다.  하지만 이번 여행으로 공상적인 한국 상이 현실적인 한국 상으로 바뀐 것 같다.

  하지만 그렇게 판단하기 전에 대사관 앞 집회에서 이야기하고 있던 말을 번역해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일본 일본" 이라고 몇 번이나 강하게 되풀이하고 청중인 아이들을 선동하는 것 같았는데 일본의 무엇을 슨 일본으로 보고 있는지 그리고한국하고 친선을 원하는 나 같은 사람들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 알고 싶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현 정권과 같은 우익하고 동일시하는 것은 싫다.

  그리고 메일을 보내준 사람은 독도사랑운동의 고문을 맡고 있다.  영토문제는 기본적으로 나에게 불모지이고 재미없는 내용이다.

2019.6.13(목)



    제가 한국 사람에게 준 메시지


할머니님들께

고생하셨습니다.  언제나 여러분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제기하는 문제가 단지 일한 사이의 문제가 아니라 이지 않고 민주주의이나 인권, 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국제적 운동이라고 생각하게됐습니다.

저도 지금 일흔 두 살로 별로 젊지 않지만 지금부터 여러분과 한국에 관한것을 생각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기원합니다.

金井 正之

가나이 마사유키

http ://mkbookreview.blogspot.com




お婆さん方へ

 お疲れ様でした。いつもあなた方のことを考えています。

 私は、あなた方が提起する問題は、単に日韓二国間の問題ではなく、民主主義や人権、平和を実現するための国際的運動だと考えるようになりました。

 私も今72才、若くはありませんが、これからもあなた方や韓国のことを考えていくつもりです。よろしくお願いします。

 健康で幸せに過ごされますことを祈念します。




     ソウル旅行記 2019.6.4~6.7


 今回のソウル旅行の目的は、韓国との親善を目指すことがメインであり、それに実践的韓国語学習という目的もあった。

 この二つの目的はタイアップしており、私の言語能力が乏しいために、今回の成果はいずれも不十分なものでしかないという結果となったが、それは最初から分かっていたことだった。しかし、およその感じを実感として体感することができたことが、せめてもの成果だろうか。

 初日6月4日(火)

 金浦空港の税関を通った後、先ず眼に入ったのが、隣り合って並んだ二つの銀行の両替ブースの、元気な声で客引きをする若い女性たちだった。私は、その二つの声に合わせて、左右に揺れ動きながら、結局右側の窓口で一万円を両替することにした。
 次はインフォーメーションの日本語ブースで、韓国語や、韓国語で言えないときは日本語で、T-moneyカードをどこで入手できるかを尋ねてみた。戻って三階、あるいは、地下鉄の入り口周辺で買えるとのことなので、地下鉄に向った。
 とっつきの洋品店に入って、T-moneyカードをどこで入手できるか尋ねたが、ここでは扱っていないというだけで、どこで入手できるかは教えてくれない。こういうのが韓国人の日本人観かと思って、少々がっかりした。
 券売機が目に入ったので、少しいじってみた。
 次は、声を張り上げて食料品を売っている若い女の子にたずねてみたが、私の韓国語が通じないらしい、今度は女の子がスマホで日本語に翻訳してくれるのだが、その日本語も何を言っているのか分からない。そうこうするうちに事情が飲み込めたらしく、彼女は相向かいのセブンイレブンを指差してくれた。私もこんな近くにコンビにあるとは、指差されるまで分からなかった。コンビニで売っているということは、前から私も知っていた。
 セブンイレブンでT-moneyカードを購入。これは現金のみで、カードは使えないようだ。T-moneyカードのチャージも現金でないと受け付けない。やはり、キャッシュは必要だ。T-moneyカードに券売機でチャージする。これは日本語、中国語、英語にも対応するようになっていた。

 次は地下鉄、どちらの方角へ行くかが問題。入り口が一つしか見あたらない、不安を感じながらも、ホームに降りて、並んでいる若い女性に尋ねてみた。「イ
チハチョル、チョンノ3ガエ カヨ?」(この地下鉄、チョンノ3ガへ行きますか)すると「ネー」(はい)と返って来て、ほっと一安心。後でよく見ると、ホームの乗り口上部に、次の停車駅と進行方向が矢印で書いてある。それにホームに降りる前に、二つのホームがある場合は、行き先と矢印が書いてあるので、それを見ればよいことに気づいた。

 チョンノ3ガで降りる。夜の八時だというのに、町は人々で賑やかだ。屋台があちこちに並んでいる。食べ物屋もあちこちにある。さてホテルはどっちか。ここで役立ったのが、なんといっても地図とシルバーコンパスだ。山歩きでシルバーコンパスの使い方を習ったことが、こういう都会でも役立つのだ。地図上で進行方向を定め、目的地に向う路地を突き止め、ゆっくり歩いて行くと、ホテルが薄暗い闇の中に現れた。事前説明の通り、ホテルの下にコンビニがあった。

 「アンニョンハセヨ」と言ったが、フロントの男性は日本語で対応した。
 ホテルのコンビニで明朝の朝飯用に、サンドイッチと牛乳を買って、帰りがけにフロントの女性に、「イー クンチョエ スーパーマーケット イッソヨ」(この近所にスーパーがありますか)と尋ねたところ、今度は韓国語で、よく聞き取れなかったが、「オルンチョゲ カソ フェンダンボドロ コンノミョン イッソヨ」(右に曲がって、横断歩道を渡ればありますよ)とか何とか言ったような気がした。翌朝行って見ると、確かに、ちょっと小規模ながらスーパーがあった。しかし朝早くてまだ開店していなかったが。

 6月5日(水)

 朝の運動をかねて、タプコル三一記念公園に行ってみることにした。今回もやはりシルバーコンパスが役に立った。公園内には朝の九時にならないと入れず、外から中の様子を塀越しに見たり、説明文を読んだりした。
 ここで韓国の現実を知った。日本でもあることだが、仕事にあぶれた大勢の老人たちが、この公園の周辺でたむろしている。中には将棋をしている人たちもいる。ちょっと異様な光景だったが、仲間と仲良くやっている感じ。ここに限らず、韓国の人は、仲間同士の仲がいいみたいだ。食堂でもほとんどがグループの客で、仲間うちで仲良く話しこんでいて、すまし顔をしている人は、あまり見かけない。
 仕事のない人は、ここに限らず、大通りの交差点の大きな木の下にもいたし、それとは部類が違うが、夜になると、じゅうたんを歩道に敷いて、夜店を開く人も多い。

 ホテルに戻って朝食を済ませ、一休みしてから、インサドン通りを歩いて、日本大使館前に行くことにした。
 インサドン通りはきれいだ。服や美術品を扱ったしゃれた店が多い。
 二つの地区の間で地図が欠けたところにあったため、日本大使館前の通りを見つけるのに失敗し、おかしいと思って引き返した。ついに日本大使館前の、例の慰安婦像を発見。12時にならないのに、既に、三、四人の初老の男女が、日本大使館に向って抗議の声を張り上げていた。何を言っているのか、その言葉を理解できなかったのが、残念だ。今度はもっと勉強して来ようと思う。慰安婦像と一緒に子どもの写真を撮影していた女性に、「チゴジュセヨ」と言って、私も慰安婦像と一緒に記念撮影してもらった。そして、その女性と、近所にいた初老の感じのいい男性にも、前から用意しておいた、私の元慰安婦のおばあさんあてのメッセージを渡した。そこには私のメールアドレスも書いてあって、もし相手にその気があれば、メールしてくれると期待するものだった。
 集会は12時始まりだというのに、中学生や高校生が、あちこちからぞろぞろ集まり始めている。あまり暑いので、12時になるまで、近くのスターバックスで一休みした。
 出て来ると、すでに集会は始まっていた。元「慰安婦」のおばあさんと思われる女性も演台に上っていて、中年くらいの女性が、おばあさんを聴衆に紹介しているらしい。
 おばあさんが退場すると、今度は同じく中年の女性が、気合の入った演説を始めた。そして演説の最後の方で、聴衆の中高生と意気を合わせ、一方、中高生の一部は、用意していたプラカードを演説する女性の掛け声に合わせて、高く掲げる。そうするように指示する女性も聴衆の横にいる。言葉の内容が分からないのと、およその雰囲気がつかめたのと、それにあまりにも暑いので、最後まで付き合わずに、そこを後にした。これが私の今回の旅行のメインなのだから、最後までいるべきだったのかもしれない。

 近所の光化門周辺を歩く王朝時代の行列を見たり、敷地内の博物館を見たりして、地下鉄5号線でホテルに帰って、一休みした。

 午後二時頃から、今度は駱山公園からソウルの町を展望しようと、ホテルから歩いて向った。地図上では大したことはないと思っていたが、予想以上に距離があって疲れた。途中でまた、二つの地区間の地図の途切れているところがあって、大学路についたかなと思ったら、まだソウル大学病院だった。病院の敷地を通過して、大学路を横断すると、徐々に上り坂になり、途中のきれいな喫茶店を通過し、少し頑張ると、ようやく頂上にたどり着いた。ここはソウルの町が一望できる場所なのだが、そしてそのことはいいことなのだが、残念なことを申し上げて申し訳ないが、大気汚染で、高いソウルタワーや近くの北漢山は、薄ぼんやりしていて、興ざめだ。
 疲れたので、帰りは地下鉄に乗って帰ることにした。4号線と1号線を乗り継いで、チョンノ3ガに到着、途中、トンデムンで下車し、清渓川の噴水を見物した。
 チョンノ3ガ近くの大通りの歩道上には、早くも夜店を開こうとして、露天商の人たちがじゅうたんを敷き、商品を並べ始めていた。

 6月6日(木)

 朝の散歩に、1987年の、独裁制からの解放運動の拠点となった、明洞のカトリック大聖堂へ行くことにした。インサドン4ギルと5ギル通りを通って下ると、意外と近いのだ。しかし、実際は往復で一時間半かかった。ここでもやはりシルバーコンパスが役に立った。朝早いのに聖堂の中には、静かに座って、何やら知らないが、祈りを奉げている人々がいた。

 ホテルに帰って一休みをして、今日のメインであるナヌムの家に行くことにした。13時の約束である。1時間半くらいかかると見て、10時頃出発した。
 地下鉄3号線の中で、私の両側に座った中年の男が話しかけてきた。私が地下鉄の地図を広げて、きょろきょろ現在地を確認していたからなのだろう。「オディソ ネリセヨ」(どこで降りるのか)などと尋ねられた。私が降車駅や今日の目的地がナヌムの家であることを明らかにしたら、握手を求めてきた。私は別れ際に、用意して来たメッセージを渡した。

 ナヌムの家は京畿広州駅からタクシーで20分、料金は1000円くらい。ナヌムの家には、すでにメールで、群馬の高崎のYさんがいることを知っていた。Yさんと慰安婦問題関連の話をしてから、館内を見学し、説明もしてもらった。
 ナヌムの家を訪れる人の国籍で一番多いのが日本、次がアメリカとのこと、またソウルの挺対協はキリスト教系で、ナヌムの家は仏教系とのことだ。いずれも1987年の民主化運動との関わりが深いのかもしれない。
 おばあさん方は、国際公聴会の韓国の李美卿(イーミギョン)さんの報告にもあるように、小学校もろくに出ていないような人が大半で、つまり、ハングルが読めない。だから、絵に描いて自らの言いたいことを表現してもらったという。そういう絵の中で、いくつかショッキングなものがあった。一つは、伝染病のチフスにかかった慰安婦たちが、穴の中に入れられ、火をつけられたが、二人だけが朝鮮兵に助けられて逃げられたというもの。もう一つは、怒りが昭和天皇に向けられ、昭和天皇を銃殺にする絵だ。

 おばあさんと一緒に夕飯でも食べていかないかと勧められたが、遅くなるし、今日は夕方から雨が降るという予報なので、現に既に雨がぽつぽつ降り始めていた、と言うと、それではおばあさんに会ってから帰られたらということで、会いに行った。
 その日は元気なおばあさん三人はどこかのイベントに出かけているらしく、寝たきりで痴呆症になりかけた二人のおばあさんに会った。ここは介護施設なのだ。
 ボランティアでフィリピン出身のカナダ人の若い女性が、かいがいしくおばあちゃんの面倒を見ていた。私が用意していたメッセージを取り出し、「チェソンヘスムニダ、コングアングア ヘンボグル キオンハムニダ」(失礼しました。ご健康とご幸福を祈念します)などと言っても通じないようで、フィリピンの女性が私の言葉を短く切って分かりやすく話してやった。またYさんも、この人は日本から来られたのですよ、などと私を紹介するのだが、通じているのかどうか、心もとない。もう一人の韓国人らしい中年の女性が、私にカラメルのような飲み物を出してくれた。別れ際におばあちゃんが「さよなら」と言ったのでびっくりした。分かっていたのだ。私はまた近づいて何と言ったか覚えていないが、何かしらおばあさんに言って別れた。「アンニョンヒ ゲセヨ」だったかな。
 Yさんがタクシーを呼んでくれ、程なく近所にいたタクシーがやって来て、京畿広州駅に到着した。今回の旅のメイン行事が終わった。

 ホテルについてから、これまでいつもサンドイッチやおにぎりばかりだったので、ホテル前の食堂に入り、牛肉入りのうどんを食べた、名前はソゴギクスだった。カードで払えるのかなと思ったら、どういうわけか、機械が合わないのか、「アンテンダ」(だめだ)ということで、現金で払った。こういうことは京畿広州駅近所のコンビニでもあった。
 昨日も今日も、日本大使館前で昨日私がメッセージを渡した男性から早くもメールが届いていた。辞書がないので、インターネットで調べれば調べられるが、また疲れていたので、返事を書く気が起こらない。返事は帰ってから、6月9日の日曜日の夜頃に書いて、すぐに送った。



 6月7日(金)

 「チェックアウト ハゲッスムニダ」(チェックアウトします)ホテルのフロントの女性に、食べ残しの半分残ったオレンジを渡した。「タ モンモゴヨ マシッソヨ」(全部は食べられません。おいしいですよ)などと言って。
 金浦空港の免税店で、みやげ物屋の叔母ちゃんたちの元気な勧誘と説明を聞いてから、ひとまず冷却期間をおくために座ってネットで調べて、(空港や地下鉄ではワイファイが通じる。しかし、ラインの送信には失敗した。)結局コチュジャンを11米ドルで買うことにした。

 羽田で顔認証用の、競馬のゲートみたいなものしか見当たらず、そこに入った。今度からはこれでいいのかとそばにいた中年の女性出入国係官に尋ねたら、それにはろくに答えず「早く向こうへ行け」と大仰に言われて、日本人警官は怖いと思った。

 以上がソウル旅行記だが、韓国には、民主主義を勝ち取った理想的な歴史があると思っていたし、また実際そうなのだろう。しかし今回の旅行で空想的な韓国像が、現実的な韓国像に変わったような気もした。
 しかし、そう判断する前に、大使館前の集会で発せられていた言葉を解読しなければならない。
 また、しかし、「イルボン、イルボン」(日本、日本)と何度も激しく繰り返し、聴衆の子どもたちを扇動していたように見受けられたが、日本のどういうものを「イルボン」と看做しているのか、韓国との親善を願う私などをどう評価しているのかなども知りたいと思った。少なくとも現政権のような右翼と同一視されたくはない。
 そして私にメールを送ってくれた人は、独島愛運動の顧問をしているのだ。領有権問題は基本的に、私にとって不毛でつまらないものだ。


2019年6月13日(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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