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年11月19日火曜日

서울 여행기 2019.6.4~6.7

   서울 여행기  2019.6.4~6.7


  이번 서울 여행의 목적은 한국하고 친선을 지향하는 것이 중심이고, 거기에 실천적인 한국말 학습이라는 목적도 있었다.

  이 두 목적은 서로 관련하고 있고 제 언어 능력이 떨어지니까 이번 성과는 둘 다 불충분한 것밖에 아닌 결과가 됐지만, 그건 처음부터 알았다.  하지만 대략적인 느낌을 실감할 수 있었던 것이 그나마 성과일까?


첫날 6월 4일 (화)

  김포 공항 세관을 통과하고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서로 붙어 나란히 있는 두 은행의 환전소에 앉아 쾌활한 소리로 손님을 당기는 젊은 여자들이었다.  저는 그 두 소리에 맞춰 좌우로 흔들렸지만, 결국 오른쪽의  창구에서 만 엔을 환전하기로 결정했다.

  다음은 안내소의 일본어 카운터에서 처음에는 한국어로, 한국어로 말할 수 없는 것은 일본어로, T-money 카드를 어디에서 살 수 있는지 물어봤다.  3층으로 돌아가거나 지하철역의 입구 주변에서 살 수 있다고 해서 지하철로 향했다. 
  첫 양품점에 들어가서 T-money 카드를 어디서 구입할 수 있는지 물었는데 취급하지 않는다도 할뿐, 어디에서 구입할 수 있는지 가르쳐 주시지 않았다.  이게 한국인의 일본인에 대한 태도인지 생각하고 조금 실망했다.

  매표기가 보여서 조금 만져봤다.

  다음은 소리를 높이면서 식료품을 팔고 있는 젊은 여자에게 물어봤지만 내 한국어가 통하지 않는 것 같았다.  다음은 그여자가 스마트 폰으로 일본어에 번역하는데 그 일본어를 몰랐다.  그럭저럭 이야기하는 사이에 사정을 이해한 것 같은데 그 여자가 건너편 세븐 일레븐을 가리켰다.  나도 이렇게 근처에 편의점이 있는 것을 가리켜줄 때까지 몰랐다.  편의점에 파는 것은 이전부터 나도 알았다.

  세븐일레븐에서 T-money 카드를 샀다.  이건 현금만 될뿐 카드를쓸 수 없는 것 같다.  T-money 카드 충전도 현금으로만 가능하다.  역시 캐시가 필요하다.  T-money 카드에 매표기로 충전했다.  이것은 일본어,중국어, 영어로도 되어 있었다.

  다음은 지하철.  어느 쪽으로 가면 되는지가 문제였다.  입구가 하나 밖에 보이지 않았다.  불안한 기분에 휩싸이면서 플랫폼에 내려가서 줄을 선 젊은 여자에게 물어봤다.  "이 지하철 종로3가에 가요?"  그러자 "네"라는 대답이 와서 한숨 돌렸다.  나중에 잘 보니까 플랫폼의 타는 곳 위에 다음 정차 역하고 진행방향이 화살표로 적혀 있었다.  그리고 플랫폼에 내려가기 전에 양쪽 플랫폼이있으면 행선지하고 화살표가 적혀 있으니까 그걸 보면 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종로3가에서 내렸다.  밤 8 시라고 하는데 동네에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포장마차가 여기저기에 줄을 짓고 있었다.  식당도 여기저기에 있었다.  그런데 호텔은 어느 쪽이지?  여기서 쓸모가 있는 건 뭐니뭐니해도 지도와 실버 나침반이었다.  산행했을 때 실버 나침반의 사용법을 배운 것이 이와 같은 도시에서도 쓸모가 있다.  지도위에서 진행할 방향을 정하고 목적지로 향하는 골목길을 알아내서 천천히 걸으니 호텔이 어둠 속에서 나타났다.  사전 설명과 같이 호텔 밑에 편의점이 있었다.

  "안녕하세요?" 냐고 했는데 프론트의 남자는 일본어로 응대했다.  호텔의 편의점에서 내일 아침으로 샌드위치와 우유를 사고 돌아와 프론트의 여자에게 "이 근처에 슈퍼마캣이 있어요?" 라고 물으니까 이번에는 한국어로잘 못 들었지만 "오른쪽으로 가서 횡단보도를 건너시면 있어요" 라고 비슷하게 뭐라고말한 것 같았다.  다음날 아침에 가보니까  조금 작지만 확실히 슈퍼마켓이 있었다.  하지만 아침 이른 시간이라서 아직 가게 문을 열지 않았다.


6월 5일 (수)

  아침 운동을 겸해서 탑골 삼일 기념 공원에 가보기로 했다.  이번에도 역시실버 나침반이 쓸모가 있었다.  공원 안에는 아침 아홉시까지는 못 들어가서 안의 상황을 담을 넘어 보거나 설명 문장을 읽거나 했다.

  여기서 한국 현실을 알았다.  일본에서도 있는 일이지만 일이 없는 노인들이 이 공원 주변으로 많이 모이고 있었다.  안에는 장기를 두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조금 이상한 광경이었지만 친구하고 사이좋게 하는 것 같았다.  여기 뿐만 아니라 한국 사람들은 친구들끼리 사이가 좋은 것 같다.  식당에서도 거의가 그룹 손님이고 친구끼리 사이좋게 이야기에 열중해 있고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은 별로 안 보인다.

  일이 없는 사람은 여기 뿐만 아니라 큰 대로 사거리에 있는 큰 나무 아래에도 있고 그것과 종류가 다르지만 저녁이 되면 융단을 보도에 깔고 야시장을 여는 사람들도 많다.

  호텔에 돌아와서 아침을 끝내고 잠깐 쉬고 인사동 길을 걸어서 일본 대사관에 가려고 했다.

  인사동 길이 아름다웠다.  옷이나 미술품을 취급하는 가게가 많다.

  두 지구 사이이기 때문에 지도에 없는 곳이 있어서 일본 대사관 앞 대로를 못 찾고 이상하다고 생각해서 되돌아왔다.  드디어 일본 대사관 앞 그위안부 상을 발견했다.  열두 시가 안 됐지만 벌써 삼 사 인 초로의 남녀가일본 대사관를 향해서 항의 소리를 질렀다.  무슨 말을 하는지 그 말을 알 수없는 게 유감스러웠다.  다음에는 더 공부해서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오 려고 했다.  위안부 상과같이 아이 사진을 찍고 있었던 여자에게 "찍어 주세요." 라고 해서 저도 위안부 상과 같이 기념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그 여자하고 근처에 있었던 느낌이 좋은 초로의 남자에게도 제가 이전에 준비하고 가져온 원래 위안부 할머니께 드리는 메시지를 줬다.

  집회는 열두 시에 여는데 중학생들이나 고등학생들이 여기저기에서 모이기 시작했다.  너무 더워서 열두 시까지 근처의 스타벅스에서 감깐 쉬었다.

  나올 때 집회가 벌써 시작됐다.  위안부 할머니로 여겨지는 여성도 무대에오르고 중년쯤 되는 여성이 그 할머니를 청중에게 소개하는 것 같았다.

  할머니께서 퇴장했을 때 마찬가지로 중년 여성이 기합이 든 연설을 시작했다.   그리고 연설의 마지막쯤 듣고 있던 중학생과 고등학생이 의기 투합해서 한쪽에서 중학생과 고교생의 일부가 준비한 플래카드를 연설한는 여성의 구호에 맞추어 높이 내걸었다.  그렇게 지시하는 연설도 청중 옆에 있었다.  이야기를 모르고 대강 분위기를 이해하고 게다가너무 더워서 마지막까지 같이 있지 않고 그곳을 떠났다.  이것이 내 이번 여행 목적이니까 최후까지 머물러야 했는지도 모르겠다.

  근처에 있는 광화문 주변을 걷는 왕조 시대의 행렬을 보고 그 안에 있는박물관을 보고 지하철 5호선으로 호텔로 돌아와서 잠깐 쉬었다.

  오후 2 시 쯤부터 이번에는 낙산공원에서 서울 시내를 내려다 보려고 호텔에서 걸어서 낙산공원으러 향했다.  지도에서 봤을 때는 별로 멀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예상 이상으로 멀어서 피곤했다.  도중에 또 두 지구 사이에 지도가 끊어진 곳이 있는데 대학로에 도착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서울대학 병원이었다.  병원 대지를 통과해서 대학로를 건넜더니 점점 오르막길이 나와서 도중의 아름다운 카페를 통과해서 조금 버티니까 마침내 정상에 도착했다.  여기는 서울시내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이지만, 아쉽게도 대기 오염으로 높은 서울 타워나 가까운 북한산이 희미해서 흥이 깨졌다.

  피곤해져서 돌아올 때는 지하철을 타고 돌아오기로 결정했다.  4호선에서 1호선으로 갈아타고 종로3가에 도착했다.  도중에 동대문에 하차해서 청계천의 분수를 구경했다.  종로3가 가까운 대로 보도에서는 일찍 부터 야시장을 열려고 하는 노점상 사람들이 융단을 깔아서 상품을 나란히하고 있다.


6월6일(목)

아침 산책으로 1987년 독재 정치부터 해방 운동의 거점이었던 명동 가톨릭 성당에 갈 결심을 했다.  인사동 4길하고 5길을 걸어서 내려가면 의외로가까웠다.  하지만 사실 한시간 반이 걸렸다.  여기서도 실버 컴퍼스가 도움이 되었다.  아침 일찍이지만 성당 안에는 조용히 앉아서 무엇인지 모르지만 기도를 올리는 사람들이 있다.

호텔에 돌아와서 잠깐 쉬고 오늘 주된 일인 나눔의 집에 갈 결심을 했다.  13 시가 약속이였다.  한 시간 반 걸린다고 들어서 열 시에 출발했다.  지하철 3 호선 전철 안에서 제 좌우 옆에 앉은 중년 남자가 말을 걸었다.  제가지하철 지도를 펼쳐서 두리번두리번 지금 있는 곳을 확인하고 있었으니?   "어디서 내리세요?" 라고 물었다.  내가 하차할 역이나 오늘 목적지가 나눔의 집이라고 설명했더니 악수를 청해 왔다.  나는 헤어질 때 준비한 메시지를 줬다.

  나눔의 집은 경기광주 역에서 택시로 이십 분이고 요금이 천엔 쯤이었다.  나눔의 집에서 벌써 메일로 군마 다카사키의 Y 씨가 있는 걸 알았다.  Y 씨하고 위안부 문제 관련의 이야기를 하고 집 안을 견학하고 설명을 들었다.

  나눔의 집을 찾는 사람의 나라 안에서 제일 많은 나라는 일본이고 다음은미국이라고 했다.  그리고 서울 정대협은 그리스도쿄계이고 나눔의 집은 불교계라고 했다.  둘 다 1987년의 민주화 운동하고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

  할머니들은 국제 공청회 한국의 이미경 씨의 보고에서도 있는데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않은 사람이 태반이고 즉 한글을 못 읽는다.  그래서 그림을그려서 자기가 말하고 싶은 것을 표현한다고 했다.  그 그림 안에 몇 가지 쇼킹한 것이 있었다.  하나는 전염병 티푸스에 걸린 위안부들이 구덩이 안으로 떨어뜨려 불을 질렀는데 두 사람만이 조선병이 구해 줘서 도망치고 있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화가 셔와 일왕에게 대하고 셔와 일왕을 총사하는 그림이다.

  할머니하고 같이 저녁을 먹지 않겠냐고 하셨지만 늦었고 오늘은 저녁부터 비가 온다고 했는데 비가 벌써 한 반을 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면 할머니께 만난 후에 돌아가면 어떻냐고 하셔서 만나러 갔다.

  그 날에는 건강한 할머니들 3분은 어딘지 이벤트에 나가신 것 같고 몸져누워 노인성 치매이신 두 할머니들을 만났다.  이곳은 간호 시설이다.

  볼런티어이고 필리핀 출신의 캐나다 사람 젊은 여자 봉사자가 부지런히 할머니를 보살폈다.  제가 준비한 메시지를 꺼내고 "죄송합니다.  건강과 행복을 기원합니다" 러고 말했지만 통하지 않는 것 같아서 필리핀 여자가 제 말을 짧게 요약해서 알기 쉽게 말해줐다.  그리고 Y 씨도 이 사람은 일본에서 왔는데요라고 저를 소개했는데 통하는지 명확하지 않았다.  다른 한국 사람인것 같은 중년 여성이 내게 개러멜 같은 마실 것을 내줬다.  헤어질때 할머니께서 "사요나라" 라고 말씀하셨는데 깜짝 놀랐다.  이해하셨다.  저는 다시 다가가서 뭘 했는지 기억하지 않지만 뭔가 할머니께 말하고 헤어졌다.  "안녕히 계세요"이었으려나?

  Y 씨가 택시를 불러줘서 곧 근처에 있던 택시가 와서 타고 경기광주역에 도착했다.  이번 여행의 주요한 행사가 끝났다.

  호텔에 도착하고 지금까지 언제나 샌드위치나 주먹밥만 먹었는데 호텔 앞식당에 들어가서 쇠고기가 들어 있는 우동을 먹었다.  그 이름은 쇠고기국수라고 했다.  카드로 지불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왜 그런지 기계가 맞지않은지 "안 된다" 고 해서 현금으로 지불했다.  이것은 경기광주역 근처에 있던 편의점에서 일어났다.

  어제도 오늘도 일본대사관 앞에서 어제 제가 메시지를 준 남자한테서메일이 왔다.  사전이 없으니까 인터넷으로 찾으면 찾을 수 있지만 피곤해서 답장을 쓸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답장은 돌아와서 6월 9일일요일 밤에 써서 바로 보냈다.


6월 7일 (금)

  "체크아웃 하겠습니다."  호텔 프런트의 여자에게 남은 오렌지를 줬다.  "다 못 먹어요" 라고 하면서.

  김포공항 면세점 안에 있는 선물 가게의 아주머니들의 기운찬 권유와 설명을 듣고 일단 냉각할 시간을 갖고 앉아서 인터넷으로 알아밨는데 (공항이나 지하철에서 와이파이가 통한다.  하지만 라인로 송신하기에 실패했다.) 결국 고추장을 11미국 달러로 사기로 결정했다.

  하네다에서 얼굴인증용인 경마 게이트와 같은 것 밖에 보이지 않아서 거기로 들어갔다.  다음 번에 이것이 괜찮은지 근처에 있던 중년 여자 출입국 담당관에게 물었더니 그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않고 빨리 건너편으로 물러가 라고 건방지게 말해서 일본 경찰관은 무섭다고 생각했다.

  이상이 서울 여행기인데 한국에서는 민주주의를 쟁취한훌륭한 역사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그런 것 같다.  하지만 이번 여행으로 공상적인 한국 상이 현실적인 한국 상으로 바뀐 것 같다.

  하지만 그렇게 판단하기 전에 대사관 앞 집회에서 이야기하고 있던 말을 번역해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일본 일본" 이라고 몇 번이나 강하게 되풀이하고 청중인 아이들을 선동하는 것 같았는데 일본의 무엇을 슨 일본으로 보고 있는지 그리고한국하고 친선을 원하는 나 같은 사람들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 알고 싶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현 정권과 같은 우익하고 동일시하는 것은 싫다.

  그리고 메일을 보내준 사람은 독도사랑운동의 고문을 맡고 있다.  영토문제는 기본적으로 나에게 불모지이고 재미없는 내용이다.

2019.6.13(목)



    제가 한국 사람에게 준 메시지


할머니님들께

고생하셨습니다.  언제나 여러분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제기하는 문제가 단지 일한 사이의 문제가 아니라 이지 않고 민주주의이나 인권, 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국제적 운동이라고 생각하게됐습니다.

저도 지금 일흔 두 살로 별로 젊지 않지만 지금부터 여러분과 한국에 관한것을 생각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기원합니다.

金井 正之

가나이 마사유키

http ://mkbookreview.blogspot.com




お婆さん方へ

 お疲れ様でした。いつもあなた方のことを考えています。

 私は、あなた方が提起する問題は、単に日韓二国間の問題ではなく、民主主義や人権、平和を実現するための国際的運動だと考えるようになりました。

 私も今72才、若くはありませんが、これからもあなた方や韓国のことを考えていくつもりです。よろしくお願いします。

 健康で幸せに過ごされますことを祈念します。




     ソウル旅行記 2019.6.4~6.7


 今回のソウル旅行の目的は、韓国との親善を目指すことがメインであり、それに実践的韓国語学習という目的もあった。

 この二つの目的はタイアップしており、私の言語能力が乏しいために、今回の成果はいずれも不十分なものでしかないという結果となったが、それは最初から分かっていたことだった。しかし、およその感じを実感として体感することができたことが、せめてもの成果だろうか。

 初日6月4日(火)

 金浦空港の税関を通った後、先ず眼に入ったのが、隣り合って並んだ二つの銀行の両替ブースの、元気な声で客引きをする若い女性たちだった。私は、その二つの声に合わせて、左右に揺れ動きながら、結局右側の窓口で一万円を両替することにした。
 次はインフォーメーションの日本語ブースで、韓国語や、韓国語で言えないときは日本語で、T-moneyカードをどこで入手できるかを尋ねてみた。戻って三階、あるいは、地下鉄の入り口周辺で買えるとのことなので、地下鉄に向った。
 とっつきの洋品店に入って、T-moneyカードをどこで入手できるか尋ねたが、ここでは扱っていないというだけで、どこで入手できるかは教えてくれない。こういうのが韓国人の日本人観かと思って、少々がっかりした。
 券売機が目に入ったので、少しいじってみた。
 次は、声を張り上げて食料品を売っている若い女の子にたずねてみたが、私の韓国語が通じないらしい、今度は女の子がスマホで日本語に翻訳してくれるのだが、その日本語も何を言っているのか分からない。そうこうするうちに事情が飲み込めたらしく、彼女は相向かいのセブンイレブンを指差してくれた。私もこんな近くにコンビにあるとは、指差されるまで分からなかった。コンビニで売っているということは、前から私も知っていた。
 セブンイレブンでT-moneyカードを購入。これは現金のみで、カードは使えないようだ。T-moneyカードのチャージも現金でないと受け付けない。やはり、キャッシュは必要だ。T-moneyカードに券売機でチャージする。これは日本語、中国語、英語にも対応するようになっていた。

 次は地下鉄、どちらの方角へ行くかが問題。入り口が一つしか見あたらない、不安を感じながらも、ホームに降りて、並んでいる若い女性に尋ねてみた。「イ
チハチョル、チョンノ3ガエ カヨ?」(この地下鉄、チョンノ3ガへ行きますか)すると「ネー」(はい)と返って来て、ほっと一安心。後でよく見ると、ホームの乗り口上部に、次の停車駅と進行方向が矢印で書いてある。それにホームに降りる前に、二つのホームがある場合は、行き先と矢印が書いてあるので、それを見ればよいことに気づいた。

 チョンノ3ガで降りる。夜の八時だというのに、町は人々で賑やかだ。屋台があちこちに並んでいる。食べ物屋もあちこちにある。さてホテルはどっちか。ここで役立ったのが、なんといっても地図とシルバーコンパスだ。山歩きでシルバーコンパスの使い方を習ったことが、こういう都会でも役立つのだ。地図上で進行方向を定め、目的地に向う路地を突き止め、ゆっくり歩いて行くと、ホテルが薄暗い闇の中に現れた。事前説明の通り、ホテルの下にコンビニがあった。

 「アンニョンハセヨ」と言ったが、フロントの男性は日本語で対応した。
 ホテルのコンビニで明朝の朝飯用に、サンドイッチと牛乳を買って、帰りがけにフロントの女性に、「イー クンチョエ スーパーマーケット イッソヨ」(この近所にスーパーがありますか)と尋ねたところ、今度は韓国語で、よく聞き取れなかったが、「オルンチョゲ カソ フェンダンボドロ コンノミョン イッソヨ」(右に曲がって、横断歩道を渡ればありますよ)とか何とか言ったような気がした。翌朝行って見ると、確かに、ちょっと小規模ながらスーパーがあった。しかし朝早くてまだ開店していなかったが。

 6月5日(水)

 朝の運動をかねて、タプコル三一記念公園に行ってみることにした。今回もやはりシルバーコンパスが役に立った。公園内には朝の九時にならないと入れず、外から中の様子を塀越しに見たり、説明文を読んだりした。
 ここで韓国の現実を知った。日本でもあることだが、仕事にあぶれた大勢の老人たちが、この公園の周辺でたむろしている。中には将棋をしている人たちもいる。ちょっと異様な光景だったが、仲間と仲良くやっている感じ。ここに限らず、韓国の人は、仲間同士の仲がいいみたいだ。食堂でもほとんどがグループの客で、仲間うちで仲良く話しこんでいて、すまし顔をしている人は、あまり見かけない。
 仕事のない人は、ここに限らず、大通りの交差点の大きな木の下にもいたし、それとは部類が違うが、夜になると、じゅうたんを歩道に敷いて、夜店を開く人も多い。

 ホテルに戻って朝食を済ませ、一休みしてから、インサドン通りを歩いて、日本大使館前に行くことにした。
 インサドン通りはきれいだ。服や美術品を扱ったしゃれた店が多い。
 二つの地区の間で地図が欠けたところにあったため、日本大使館前の通りを見つけるのに失敗し、おかしいと思って引き返した。ついに日本大使館前の、例の慰安婦像を発見。12時にならないのに、既に、三、四人の初老の男女が、日本大使館に向って抗議の声を張り上げていた。何を言っているのか、その言葉を理解できなかったのが、残念だ。今度はもっと勉強して来ようと思う。慰安婦像と一緒に子どもの写真を撮影していた女性に、「チゴジュセヨ」と言って、私も慰安婦像と一緒に記念撮影してもらった。そして、その女性と、近所にいた初老の感じのいい男性にも、前から用意しておいた、私の元慰安婦のおばあさんあてのメッセージを渡した。そこには私のメールアドレスも書いてあって、もし相手にその気があれば、メールしてくれると期待するものだった。
 集会は12時始まりだというのに、中学生や高校生が、あちこちからぞろぞろ集まり始めている。あまり暑いので、12時になるまで、近くのスターバックスで一休みした。
 出て来ると、すでに集会は始まっていた。元「慰安婦」のおばあさんと思われる女性も演台に上っていて、中年くらいの女性が、おばあさんを聴衆に紹介しているらしい。
 おばあさんが退場すると、今度は同じく中年の女性が、気合の入った演説を始めた。そして演説の最後の方で、聴衆の中高生と意気を合わせ、一方、中高生の一部は、用意していたプラカードを演説する女性の掛け声に合わせて、高く掲げる。そうするように指示する女性も聴衆の横にいる。言葉の内容が分からないのと、およその雰囲気がつかめたのと、それにあまりにも暑いので、最後まで付き合わずに、そこを後にした。これが私の今回の旅行のメインなのだから、最後までいるべきだったのかもしれない。

 近所の光化門周辺を歩く王朝時代の行列を見たり、敷地内の博物館を見たりして、地下鉄5号線でホテルに帰って、一休みした。

 午後二時頃から、今度は駱山公園からソウルの町を展望しようと、ホテルから歩いて向った。地図上では大したことはないと思っていたが、予想以上に距離があって疲れた。途中でまた、二つの地区間の地図の途切れているところがあって、大学路についたかなと思ったら、まだソウル大学病院だった。病院の敷地を通過して、大学路を横断すると、徐々に上り坂になり、途中のきれいな喫茶店を通過し、少し頑張ると、ようやく頂上にたどり着いた。ここはソウルの町が一望できる場所なのだが、そしてそのことはいいことなのだが、残念なことを申し上げて申し訳ないが、大気汚染で、高いソウルタワーや近くの北漢山は、薄ぼんやりしていて、興ざめだ。
 疲れたので、帰りは地下鉄に乗って帰ることにした。4号線と1号線を乗り継いで、チョンノ3ガに到着、途中、トンデムンで下車し、清渓川の噴水を見物した。
 チョンノ3ガ近くの大通りの歩道上には、早くも夜店を開こうとして、露天商の人たちがじゅうたんを敷き、商品を並べ始めていた。

 6月6日(木)

 朝の散歩に、1987年の、独裁制からの解放運動の拠点となった、明洞のカトリック大聖堂へ行くことにした。インサドン4ギルと5ギル通りを通って下ると、意外と近いのだ。しかし、実際は往復で一時間半かかった。ここでもやはりシルバーコンパスが役に立った。朝早いのに聖堂の中には、静かに座って、何やら知らないが、祈りを奉げている人々がいた。

 ホテルに帰って一休みをして、今日のメインであるナヌムの家に行くことにした。13時の約束である。1時間半くらいかかると見て、10時頃出発した。
 地下鉄3号線の中で、私の両側に座った中年の男が話しかけてきた。私が地下鉄の地図を広げて、きょろきょろ現在地を確認していたからなのだろう。「オディソ ネリセヨ」(どこで降りるのか)などと尋ねられた。私が降車駅や今日の目的地がナヌムの家であることを明らかにしたら、握手を求めてきた。私は別れ際に、用意して来たメッセージを渡した。

 ナヌムの家は京畿広州駅からタクシーで20分、料金は1000円くらい。ナヌムの家には、すでにメールで、群馬の高崎のYさんがいることを知っていた。Yさんと慰安婦問題関連の話をしてから、館内を見学し、説明もしてもらった。
 ナヌムの家を訪れる人の国籍で一番多いのが日本、次がアメリカとのこと、またソウルの挺対協はキリスト教系で、ナヌムの家は仏教系とのことだ。いずれも1987年の民主化運動との関わりが深いのかもしれない。
 おばあさん方は、国際公聴会の韓国の李美卿(イーミギョン)さんの報告にもあるように、小学校もろくに出ていないような人が大半で、つまり、ハングルが読めない。だから、絵に描いて自らの言いたいことを表現してもらったという。そういう絵の中で、いくつかショッキングなものがあった。一つは、伝染病のチフスにかかった慰安婦たちが、穴の中に入れられ、火をつけられたが、二人だけが朝鮮兵に助けられて逃げられたというもの。もう一つは、怒りが昭和天皇に向けられ、昭和天皇を銃殺にする絵だ。

 おばあさんと一緒に夕飯でも食べていかないかと勧められたが、遅くなるし、今日は夕方から雨が降るという予報なので、現に既に雨がぽつぽつ降り始めていた、と言うと、それではおばあさんに会ってから帰られたらということで、会いに行った。
 その日は元気なおばあさん三人はどこかのイベントに出かけているらしく、寝たきりで痴呆症になりかけた二人のおばあさんに会った。ここは介護施設なのだ。
 ボランティアでフィリピン出身のカナダ人の若い女性が、かいがいしくおばあちゃんの面倒を見ていた。私が用意していたメッセージを取り出し、「チェソンヘスムニダ、コングアングア ヘンボグル キオンハムニダ」(失礼しました。ご健康とご幸福を祈念します)などと言っても通じないようで、フィリピンの女性が私の言葉を短く切って分かりやすく話してやった。またYさんも、この人は日本から来られたのですよ、などと私を紹介するのだが、通じているのかどうか、心もとない。もう一人の韓国人らしい中年の女性が、私にカラメルのような飲み物を出してくれた。別れ際におばあちゃんが「さよなら」と言ったのでびっくりした。分かっていたのだ。私はまた近づいて何と言ったか覚えていないが、何かしらおばあさんに言って別れた。「アンニョンヒ ゲセヨ」だったかな。
 Yさんがタクシーを呼んでくれ、程なく近所にいたタクシーがやって来て、京畿広州駅に到着した。今回の旅のメイン行事が終わった。

 ホテルについてから、これまでいつもサンドイッチやおにぎりばかりだったので、ホテル前の食堂に入り、牛肉入りのうどんを食べた、名前はソゴギクスだった。カードで払えるのかなと思ったら、どういうわけか、機械が合わないのか、「アンテンダ」(だめだ)ということで、現金で払った。こういうことは京畿広州駅近所のコンビニでもあった。
 昨日も今日も、日本大使館前で昨日私がメッセージを渡した男性から早くもメールが届いていた。辞書がないので、インターネットで調べれば調べられるが、また疲れていたので、返事を書く気が起こらない。返事は帰ってから、6月9日の日曜日の夜頃に書いて、すぐに送った。



 6月7日(金)

 「チェックアウト ハゲッスムニダ」(チェックアウトします)ホテルのフロントの女性に、食べ残しの半分残ったオレンジを渡した。「タ モンモゴヨ マシッソヨ」(全部は食べられません。おいしいですよ)などと言って。
 金浦空港の免税店で、みやげ物屋の叔母ちゃんたちの元気な勧誘と説明を聞いてから、ひとまず冷却期間をおくために座ってネットで調べて、(空港や地下鉄ではワイファイが通じる。しかし、ラインの送信には失敗した。)結局コチュジャンを11米ドルで買うことにした。

 羽田で顔認証用の、競馬のゲートみたいなものしか見当たらず、そこに入った。今度からはこれでいいのかとそばにいた中年の女性出入国係官に尋ねたら、それにはろくに答えず「早く向こうへ行け」と大仰に言われて、日本人警官は怖いと思った。

 以上がソウル旅行記だが、韓国には、民主主義を勝ち取った理想的な歴史があると思っていたし、また実際そうなのだろう。しかし今回の旅行で空想的な韓国像が、現実的な韓国像に変わったような気もした。
 しかし、そう判断する前に、大使館前の集会で発せられていた言葉を解読しなければならない。
 また、しかし、「イルボン、イルボン」(日本、日本)と何度も激しく繰り返し、聴衆の子どもたちを扇動していたように見受けられたが、日本のどういうものを「イルボン」と看做しているのか、韓国との親善を願う私などをどう評価しているのかなども知りたいと思った。少なくとも現政権のような右翼と同一視されたくはない。
 そして私にメールを送ってくれた人は、独島愛運動の顧問をしているのだ。領有権問題は基本的に、私にとって不毛でつまらないものだ。


2019年6月13日(木)

2019年10月7日月曜日

中曽根康弘 インドネシア原住民慰安所を設置 2019.10


海軍主計士官(将校)の地位にあった中曽根元首相が、慰安所の設置に積極的に関わり、慰安婦の調達をしていた。

①     『終わりなき海軍』

中曽根康弘は、戦時中に海軍に所属し戦後各界で活躍した成功者たちが思い出話を語った本である『終りなき海軍』(松浦敬紀・編/文化放送開発センター/1978)の中で、慰安所を設立した事実を書いた。タイトルは「二十三歳で三千人の総指揮官」。当時、インドネシアの設営部隊の主計長だった中曽根が、荒ぶる部下たちを引き連れながら、いかに人心を掌握し、戦場を乗り切ったかという自慢話である。

「三千人からの大部隊だ。やがて、原住民の女を襲うものやバクチにふけるものも出てきた。そんなかれらのために、私は苦心して、慰安所をつくってやったこともある。かれらは、ちょうど、たらいのなかにひしめくイモであった。卑屈なところもあるし、ずるい面もあった。そして、私自身、そのイモの一つとして、ゴシゴシともまれてきたのである」

2007年3月23日、中曽根が日本外国特派員協会で会見をした際、アメリカの新聞社の特派員からこの記載を追及されたが、そのとき、中曽根元首相は「旧海軍時代に慰安所をつくった記憶はない」「事実と違う。海軍の工員の休憩と娯楽の施設をつくってほしいということだったので作ってやった」「具体的なことは知らない」と完全否定している。
『終わりなき海軍』の編者である松浦敬紀は、その10年ほど前、「フライデー」の取材に「中曽根さん本人が原稿を2本書いてきて、どちらかを採用してくれと送ってきた」「本にする段階で本人もゲラのチェックをしている」と言っていた。


②     防衛研究所の戦史研究センター所収の資料「海軍航空基地第2設営班資料」(以下、「第2設営班資料」)

 この資料は、第2設営班の工営長だった宮地米三が記録し、戦史研究センターに寄贈したものである。
第2設営班とは、中曽根が当時、主計長として統括していた海軍設営班矢部班のことである。

「第二設営班矢部部隊」
「一編制」
「主計長海軍主計中尉中曽根康弘」
「5、設営後の状況」

「バリクパパンでは◯(判読不可、飛行)場の整備一応完了して、攻撃機による蘭印作戦が始まると、工員連中ゆるみが出た風で、又日本出港の際約二ヶ月の旨申し渡しありし為、皈(ママ)心矢の如く、気荒くなり、日本人同志けんか等起る様になる。主計長の取計で、土人女を集め、慰安所を開設、気持の緩和に非常に効果ありたり」

また「上陸時」と「完了時」の地図があり、「上陸時」から「完了時」の地図の変化のひとつとして、孤立した民家の周辺に、設営班が便所をおいたと記されており、その場所に「上陸時」になかった「設営班慰安所」と書き加えられている。


彼女(土人女)たちは、「日本軍に命じられた村の役人の方針で、どんなことをさせられるのかも知らないまま、日本兵の引率のもとに連れ去られた」ことを証言している。そして、年端も行かない女性達が「いきなり慰安所で複数の日本兵に犯された」という悲惨な体験が語られ、その中にはこのパリクパパンの慰安所に連れてこられたという女性もいる。


安倍政権が、慰安婦問題はなかったことにするために立ち上げた自民党のプロジェクト「日本の名誉と信頼を回復するための特命委員会」の委員長に中曽根の息子である中曽根弘文が就任した。

フジ産経グループの総帥だった鹿内信隆も、慰安所づくりに関与したと発言している。


出典


感想 戦前の日本軍が犯した罪を認めることは「日本を貶める」ことにはならない。それを否定することこそ貶めるということを理解すべきだ。「広島や長崎への原爆や東京大空襲はなかった、それは日本人のでっち上げだ」と言われたらどう思うか、立場を入れ替えて考える度量の大きさが求められる。

2019年10月3日木曜日

戦争中の国際社会の南京大虐殺に対する反応 ―― 米国を中心として 南京師範大学 張連紅 要旨・抜粋・感想


2018年南京大虐殺81ヵ年 証言を聞く東京集会報告集 全水道会館 2018.12.12
戦争中の国際社会の南京大虐殺に対する反応 ―― 米国を中心として 南京師範大学 張連紅

017 日本の兵士たちは、自分たちが行った残酷な暴行を、家族に伝えなかった。日本国民は東京裁判で初めて昔の暴行の数々を知るようになった。しかし当時外国人の記者たちは既に国際社会に向けて報道していた。
 日本軍は南京を占領してから最初の6週間のうちに、一般人と戦争捕虜に対する大規模な虐殺、女性に対する強姦、略奪放火等の暴行を行った。
南京の西側外交官も日本軍の暴行を各国政府に報告した。

018 
一、戦争中の西側記者は国際社会に対して南京大虐殺の暴行を適時報道した。

 日本軍は南京を攻撃する前の夕方、全ての西側人士に南京から離れるように要求したが、5名の米英記者が南京に留まり、戦争の進展具合を報道した。ニューヨーク・タイムズの Frank Tillman Durdin, シカゴ・デイリー・ニューズの Archibald T. Steel, AP通信社の C. Yates Mcdaniel, 米国パラマウントの Arthur Memken, 英国ロイター社の L. C. Smith である。日本軍は南京占領後、西側記者にすぐに南京を離れるように要求した。15日、スチール、ダーディン、スミス、メンケン等4人は、米国砲艦オアフ号で上海に向かい、翌日AP通信のマクダニエルは南京を離れた。
電報を打てたのはオアフ号に乗船してからのことだった。シカゴ・デイリー・ニューズは、スチール記者の報告に基づき、米国時間15日、中国時間16日、目撃者の叙述、陥落都市四日間の地獄のような日々、街路の死体は5フィート(1.5メートル)の高さに積み重なっていることなどを主題とした詳細な報道を行った。

 私はたった今、南京攻撃が始まってから最初に首都を離れた外国人とともにオアフ号軍艦に乗った。南京を離れるに当たって、私たちが最後に見た場面は、300名の一群の中国人が、長江に面する城壁の前に整然と並んで処刑されており、その死体は膝の高さまであったということである。これはこの数日の凄まじい南京の風景の典型的な写真である。…
 子羊を屠殺するような虐殺。どれくらいの数の軍人が被害に会い殺されたか、計算もできない。5000から20000の間かもしれない。
 陸路が切断されたので、中国軍人は挹江門を通ってどっと川辺に向かったが、挹江門はすぐに閉鎖された。
 長江を渡る船を見つけ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沢山の軍人が長江に飛び込み、十中八九が溺死した。
… 彼らは捜し出せた中国兵や官員を全て殺戮することで、ようやく満足した。 … 一人の日本兵が増え続ける死体の山の上に立って、歩兵銃の弾を、まだ少しでも動ける死体に注ぐ。日本人に言わせるとこれは戦争で、私たちに言わせればこれは計画的虐殺だ。最も正確な統計によれば、日本人が南京で処刑したのは2万人、上海から南京の過程での殺戮は11万4千人の中国兵である。この過程での日本人の損失は1万1千2百の兵である。

021 『ニューヨーク・タイムズ』南京大虐殺に関連する報道1937.12.13--1938.1.31(全21回より抜粋)
発表日時      題目        記者
1937.12.19 日本人は南京暴行を取り締まる ハレット・アベンド Hallett Abend
1937.12.24 日本軍大佐はまだ処罰されていない ハレット・アベンド
1938.1.9 中国指揮官逃走:日本軍の暴行は南京の陥落を示している:侵略者は20000人を処刑、日本軍が、包囲された市民を集団虐殺――中国人死亡総数33000人に達す ダーディン
1938.1.15 日本軍は数百の婦女、少女に残酷な対応 ハレット・アベンド
1938.1.23 日本軍は南京での略奪を継続;米国領事正式に抗議 
1938.1.25 南京の混乱は続く、それは軍隊の反乱を暗示 ハレット・アベンド
1938.1.26 南京の日本軍は法を破り、天理をわきまえない(社説)
1938.1.28 外交官が日本軍兵士に平手打ちされた:米国駐在南京代理公使ジョン・アリソンが平手打ちされた。――米国は日本に抗議、軍当局は兵士の行為を支持。 ハレット・アベンド

資料出所:張憲文編集『南京大虐殺史料集』第6冊『外国メディア報道とドイツ大使館報告』、第29冊『国際検察局文書・米国新聞雑誌報道』、江蘇人民出版社2005, 2007

023
二、南京暴行を経験した西側人士の日本軍暴行の暴露
 日本軍南京占領の初期、20人以上の西洋人士が南京に留まり、日本軍の暴行を目撃した。14人の米国人、6人のドイツ人、2人のロシア人、1人のオーストリア人(1938年3月15日、ドイツによるオーストリア併合で、ドイツ人になった)、1人のデンマーク人であった。
 西側人士が組織した南京安全区国際委員会の会則があるので、ほとんど毎日、日本領事館に日本軍の暴行事例を報告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この人たちのほとんどは、戦争の期間中、書簡、日記、講演、映像等で国際社会に南京の日本軍の暴行を暴露した。
 南京安全区国際委員会のマネジャー役を担ったフィッチは、米国に行き、真相を伝えた。
 南京国際紅十字会の主席宣教師の John G. Magee は、16ミリ撮影機でこっそりと日本軍の暴行を撮影した。その最初のもの(1―4号フィルム)を、フィッチ George Ashmore Fitch が預かり、上海に運び、上海コダック社で編集・現像し、4セットをつくった。
 フィッチは1883年1月中国蘇州で生まれ、中国名は費呉生という。米国のニューヨークユニオン神学校とコロンビア大学を卒業し、1909年長老会から中国への伝道に派遣され、上海国際基督教青年会YMCAで働き、1936年、南京に来て、国民政府の新生活運動顧問となった。
024 デンマーク人1人と、ドイツ人1人は、南京城から20km離れたコンクリート工場にいた。24人の欧米人が当時南京に残っていた。
 国際安全区は、城内の西側にあり、主に欧米の教会の資金によって作られた大学や、大使館、領事館が集中した地域で、面積は3.86平方km、南京城の8分の1を占める。国際安全区が作られてから暴行を避けるために25万人の難民が安全区に避難した。20数名の安全区の欧米人は難民を守るために活動した。日本軍の暴行を日本領事館に報告し、暴行を止めさせるように要請した。また彼らは書簡、日記、映像等を上海に運び、そこから国際社会に発信して日本政府に圧力をかけた。
025 マギーは第三者の立場で客観的に南京の状況を撮影した。夏淑琴さんの家族の被害状況も撮影した。日本の従軍記者たちは平和的で友好的に日本の軍人を歓迎する南京市民という作られた情景を撮影するばかりだったが、国際社会は、欧米人の発信した情報によって、日本の発信が偽物であることを見破っていた。
 フィッチが、マギーのフィルムを運んだ。1938年1月29日の朝、フィッチは英国外交官プリダ・ブルーン Prideaux-Brune とともに英国のガンボート「ビー(ミツバチ)号」で南京を離れた。彼は次のように回想している。

朝6時40分日本軍の列車に乗って上海に着いた。私は一群の平然として恥知らずな兵隊たちと押し合いへし合いして一緒だったので、少し緊張した。なぜなら8巻の日本軍暴行に関する16ミリフィルムを私のラクダの毛のコートの裏に縫いこんでいたからである。その大部分は金大病院(鼓楼病院)で撮影したものだ。上海に入るとき私のカバンは詳細に検査された。… これらはとても恐ろしいものであるが、人々は見たものを真実だと言わないわけにはいかない。… 私は米国のコミュニティー教会やその他の地方でこの映像を上映するように求められた。

026 彼が記憶違いしているところがある。彼が最初に上海にフィルムを持って乗ったのは英国のガンボート「ビー」号で、2月12日、米国軍艦「オアフ」号に乗って、南京に戻った。2月20日、彼が二度目に上海に行ったときの交通手段は汽車で、マギーのネガフィルムは、最初に上海に行ったときに運んでいた。
 フィッチは、米国へ向かう途中、広東省主席呉鉄城の主宰で、日本軍の南京での蛮行に関する講演を行った。この旅行は国際宣伝部から派遣要請されたものであった。ホノルルでは中国ホノルル駐在総領事梅景周と会見し、講演とマギーフィルムの上映を一度行った。1938年3月14日、フィッチはサンフランシスコに到着し、『日本軍南京のレイプ』と題する発表を行い、ロサンゼルスでは、講演とマギーフィルムの上映を行った。フィッチは、フィルムを上映したときの様子を、次のように回想している。

… one where I showed my films which caused something of a sensation, even illness on the part of a couple of the audience.

 3月18日、フィッチはワシントンに来て、国会外交事務委員会、戦争情報局、新聞界などでマギーフィルムを上映した。その後、ニューヨーク、シカゴ等多くの都市で講演したが、マギーフィルムの上映回数は少なかった。その主要原因は、彼の友人が、フィルムはとてもぞっとする ghastly もので、時には観衆の気分を悪くさせると言ったからである。
027 元AP通信の記者 Earl H. Leaf も、4月初め、ロンドンからニューヨークに来て、マギーフィルムを上映した。マギーフィルムは、米国で一定の影響をもたらし、1938年5月16日、米国雑誌『ライフ』は、 “These Atrocities Explain JAP Defeat” という題で、南京暴行の写真を掲載した。
 1944年、フランク・カプラ監督の映画『我々は誰のために戦うか:中国の戦争』は、マギーフィルムの日本軍の暴行の映像を引用し、人々に大きな影響を与えた。
 もう一つのセットは、英国の平和活動家M・レスター女史が、4人の日本人牧師と協力し、日本に持ち込み、日本人に見せた。またもう一つのセットは、ドイツの外交官がドイツに持ち帰り、ヒトラーに見せた。
029 マギーフィルム以外にも多くの書物、日記、書簡が発表され、人々に大きな影響を与えた。

三、戦争中の西側外交官の南京の暴行に関する報告

 日本当局の要求に基づいて、日本が南京を占領する1937年12月13日の前日の夕刻、米英独の南京駐在外交官は、国民党政府と共に、南京から漢口に避難したり、揚子江に停泊していた軍艦や、上海に避難したりしていた。南京陥落後、彼らは南京に戻ることを日本側に要求し、1938年1月6日、米国駐中国大使館三等書記官アリソン、副領事ジェイムズ・エスピィ等三人は、南京の米国大使館に戻ることを許された。三日後、ドイツ外交官ローゼンと英国外交官プリドー・ブルーンも南京に戻った。日本軍はほしいままに虐殺、強姦等の暴行をなおも継続していた。以下は米国外交官アリソンの報告である。

米国住民は、人を身震いさせるような状況について話してくれた。日本軍は、ほしいままに中国市民を虐殺し、女性を強姦し、しかもあるときはそれが米国敷地内でも起きた。そして12月最後の1週間に日本軍人は米国大使館の中を略奪した。大通りのほとんどの商店が略奪され、大多数が放火された。
1月18日、ようやく日本側は米国大使館に無線通信を設置することに同意した。
031 1月15日の正午から本日(18日)正午までの間に、日本軍兵士は、15回以上、米国敷地内へ不法侵入し、略奪するとともに、避難していた10名位の中国人女性難民を拉致した。

1月25日、アリソンとエスピィは以下のような報告書を作成した。

日本兵は野蛮人の如くやりたい放題にこの都市を侮辱した。全市の数知れない男性、女性、子供が殺害された。一般市民は理由もなく銃殺され、あるいは刺殺され、それは尽きることがない。日本人が言うには死体を処理しているとのことだが、室内、城の壕のなか、道端にまだ死体を見ることができる。
 日本兵は至る所で性欲を満たすために現地の女性を探した。当地の外国人は、このような事例が一晩で数千を下らないと確信している。米国財産に関する事件は、一晩に30件ある、という米国人の統計がある。
殺人と強姦はなお不断に発生している。この街は、この強盗軍隊が意のままに蹂躙するに任せている。日本兵はほとんど全ての家、全ての建物に侵入し、欲しい物をあらいざらい取って満載して帰る。
 このとき漢口にいたジョンソン Nelson Trusler Johnson 米国大使も次のように語っていた。「中国兵が安全区に逃げ込み、武器を外国人委員会に提出したが、日本兵はそういう中国人を大勢殺した。日本側の意図は、そんなことをしても白人は助けてくれないことを中国人に示すためだったのではないか」と。
グルー Grew, Joseph C 駐日米大使も、キリスト教総会のボイントン Boynton 神父の考えを代弁し、次のように語った。「日本の将校が故意に、日本兵に勝手気ままにさせたのは、それが(中国人)処罰の一つのやりかただったからだ。」また、駐漢口ジャビス領事も同様のことを語っていた。
032 (以下の部分は文章としておかしく意味不明である。日本側が、南京で30万人以上が殺されたと海外で報道されている事実を知っていることが、日本の外相広田からワシントン駐在日本大使に宛てた電報1938.2.1の解読によって明らかになり、それが『シカゴ・デイリー・ニューズ』に報道されたということか。)米国が解読した「広田電報」の内容は、次の通りである。
「少なくとも30万人の中国市民が殺された。多くの場合、残忍な手段で。略奪、強姦、少女に対する強姦、市民に対する残忍非道な野獣の行為が、敵対行動が既に停止した地域で継続していると報道された」という内容で、日本軍が、上海から南京進撃までの間と、南京占領後とで、少なくとも30万人の中国市民を虐殺したとしている。
 ルーズベルトは、部下から上がってくる報告を新聞社にリークすることによって、日本政府は、日本兵の略奪を制止する能力がないことや、米国財産を保護することができないこと、将校でさえ中国人女性を強姦していることなどを証明できると考え、また中国国内の米国資産に対する日本側の侵害行為に対する対抗処置として、米国内の日本資産の凍結を検討した。
 1938年1月9日、ドイツ大使館南京事務所の政務秘書ローゼンと行政秘書シャルフェンベルクは、南京に戻り、南京情勢をドイツ本国に報告した。この報告は1980年末にドイツの学者によって発見された。

絶え間なく米国教会病院に送られる女性がいる。これらの女性は心身に大きな傷を受けており、まず輪姦され、その後銃剣で殺害されなかったとしても、他の手段で傷を負っていた。ある女性の頸部は、半分ほど割られたが、この不幸な女性は生きながらえ、ウイルソン医師を驚愕させた。ある妊婦は腹部を刺され、腹の中の嬰児は刺されて死んだ。沢山の強姦された幼い少女たちの中の一人は、ほとんど20人に輪姦された。英米煙草会社パーソンズ氏の住宅を、私の英国人同僚が視察したとき、一人の女性の死体を発見した。ゴルフの棒を下からこの女性の体に直接差し込まれていた。毎晩日本兵が金陵大学院の中に設置された難民区に乱入し、彼らは女性を連れ去り、強姦するのでなければ、他人の目の前で、家族の目の前で、彼らのおぞましい性欲を満たすのだ。

034 この報告は1938年3月まで続いたが、駐中国ドイツ大使トラウトマンを含めたほかの外交官の報告は、ドイツの「親日棄華」の外交政策と一致せず、1938年6月、タッドマン(トラウトマンか)、ローゼン等はドイツに召還されて捨てられた。ローゼンの南京滞在中の報告は沢山あったが、どういうわけか、ローゼンが国民政府の駐米大使に連絡したにもかかわらず、極東国際軍事法廷と南京国防部軍事法廷で証拠として取り上げられなかった。

 この20年間に中国の研究者は、書簡、日記、写真などを手に入れ、2005年から2010年までの間に、72冊の資料集として出版した。それは政府側の資料であり、米英独の歴史資料館の資料を収集している。

四、結語
 当時の日本当局は、西側記者が南京に留まって取材報道をするのを強制的に阻止しただけでなく、上海における西側記者が国際社会に電報を打つのも厳格に報道検閲した。日本当局は、南京に留まった西側人士の行動の自由を厳格に制限し、威嚇し、西側外交官が南京に戻るのをいろいろな理由で遅らせた。しかし国際社会の主流メディアは絶え間なく報道し、西側主要国の政府と民衆は、日本軍の南京における暴行を広く知った。
 日本政府上層部も、その報道を通して南京の様子を知った。駐在国日本外交官も同様にそのことを知り、それを日本の外務省に報告した。南京の日本領事館員も日本政府に報告した。
英米の外交官は南京に戻ってから日本に抗議したが、日本の民衆は、厳重な統制のために知らされなかった。当時金陵女子大難民所の宣教師ヴォーリン女史は、「日本の良識ある人が、南京で起きていることを知ったらいいのに」と書いている。
036 『ニューヨーク・タイムズ』の記者ダーディンはこう言った。

日本軍の南京占領には、最高至上の軍事的・政治的意義がある*が、彼らの野蛮で残忍な、捕虜の集団虐殺、街全体における略奪、女性の強姦、市民の虐殺と恣意的な破壊によって(私は)失意に沈んだ。この蛮行は、日本軍と日本国家の名誉の上で汚点となる。(*戦争行為は誉めているのか。)

 またドイツの外交官ローゼンはこう言った。

日本の軍隊による放火は、日本が占領してから一ヶ月以上経った今でも燃えており、女性と幼い少女に対する凌辱と強姦行為はまだ継続している。南京の日本軍はこのようなことをなすことで、自分自身のために恥辱の記念碑をうち建てた。

 国際社会が暴露したので、国際社会の中国に対する同情と反日感情の高まりが引き起こされた。米国では、組織的な日貨排斥運動が出現しただけでなく、「日本侵略に参加しない米国委員会」「日本侵略排斥委員会」「米国平和民主連盟中国援助委員会」「中国救済キリスト教委員会」などが設立され、米国に普遍的な反日感情が出現した。
シカゴ駐在日本領事館は「米国人の対日感情が甚だしく悪化した。このことは、私たちの演説に対する聴衆の態度や、領事館に送りつけられる脅迫文書や、新聞の記事や、また多くの人が日米協会主席の辞職を要求したことなどで分かる。」と報告した。
また、ワシントン駐在日本大使館は、東京に次のような電報を打った。反日感情の原因の第一は、「南京と上海への爆撃の誇大報告、無数の無辜の市民に大災害をもたらしたことが、米国人の感情を逆なでした。… 南京占領時の混乱の誇大報告…」第二は、「大量の軍隊の派遣、大破壊、戦争法規と人道に対する違反行為の責任」である。さらに「米国宣教師の中国民衆に及ぼした思想的影響」も原因として上げた。

037 質疑応答
(1)「PTSDの復員日本兵と暮らした家族が語り合う会」の会員からの意見表明。
父親は復員したが、精神に異常を来し、ちゃんとした仕事に就けず、貧乏の中で私は成長した。父は戦争のことは口を閉ざしたまま亡くなった。
(2)30万人説など数の問題は、なぜ重要な問題ではないのか、との問いに対する張教授の回答。
これは、1996年から1999年まで中日両国政府の下で集まった両国の学者の一致した意見である。
 第一に、暴行、性暴力が大規模かつ広範囲に行われたことを確認する。
第二に、正確に何人殺されたかという結論に達することは難しいので、とりあえず、東京裁判で確認されたこと(日本軍が占領してから最初の6週間で、南京とその周辺で殺害された一般人と捕虜の総数は20万人以上。埋葬隊記録では155,000体だが、これは焼き捨てられた死体や、揚子江に投げ込まれた死体を計算に入れていない)、それと南京軍事法廷で確認されたこと(被害者総数は30万人以上に達する)を記録として確認しようということで両国の学者は一致した。
はっきりした数字にたどり着くには大変な裁判が必要だ。また日本軍は資料を廃棄した。これまで知られている事実は、すべて中国の証言や資料に基づくものだ。当時の被害状況を完全に把握することは不可能だ。この資料は、種々な制約の下に行われた、中国国民党の被害調査に基づいたもので、完全で正確とはいえない。
日本政府が30万人ではないことを明らかにする義務を負っている。私たちにも数字を正確にする義務はあるが、具体的な一人ひとりの悲劇の事実に眼を背けることはできない。
―――――――――――――――――――――――――――――
常志強さん自身の証言は、以下で見ることができる。


以上 2019年10月3日(木)

2019年10月1日火曜日

常小梅さん証言 「私の父は南京大虐殺幸存者の常志強」感想・要旨


2018年南京大虐殺81ヵ年 証言を聞く東京集会報告集 全水道会館 2018.12.12


常小梅さん証言 「私の父は南京大虐殺幸存者の常志強」


感想 

常小梅さんのお父さんの体験を聞いて、我々日本人の祖先がどれほどむごいことをやったか、大変申し分けないと思った。常さん家族がなぜこんな目に会わ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のか、日本のやり方は間違っていたとしか言いようがない。近隣諸国は仲良くしなければならない。日本はどこかで判断を間違えたに違いない。言い訳は許されない。貪欲、差別、自己中天皇制か。

常さんのお父さんの家族は大所帯だった。曾祖母、祖母、父母、姉、弟4人の10人家族だった。そのうちの6人、父母、弟4人が、日本兵に殺され、姉も、その後細菌をばらまかれて、発疹チフスで亡くなってしまった。取り残された父は、苦しい人生を送ったが、助けてくれる人もいた。
父の家族の体験を彫像で表現したものが、南京の侵華日軍南京大虐殺遭遇同胞起念館*に展示されている。

*大屠殺、遭難、遇難など様々な表記がある。


要旨

父の名前は常志強という。1928年2月4日生まれで、現在(2018)91歳である。私は父の娘で1960年生まれである。
私の父の家族は、南京の夫子廟で小さな雑貨店を営んでいた。父は聡明で聞き分けがよかった。
1937年8月15日、日本の戦闘機が南京を無差別爆撃した。父の祖母と曾祖母は纏足で逃げ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1937年の冬、二人をおいて難民区へ逃げることにした。
1937年12月12日の午後、南京城を守る中国軍はいなくなっていたが、住民はそのことを知らなかった。1937年12月13日の早朝、南京は陥落した。日本軍は城内に砲撃を加え、城内は火の海になった。しばらくすると城内に日本軍が入ってきて、日本兵は、誰彼構わず難民に向かって撃ちまくり、人を見るとすぐに刀で切りつけ、銃剣で刺した。父の母が、泣き始めた一番下の子供小来来を抱いて乳を飲ませようとしたとき、日本軍人が銃剣で母を刺したが、まだ子供を抱きしめていられた。しかし、二度目に刺されると、子供を放してしまい、子供は大声で泣いた。日本兵は銃剣で子供の尻を突き刺して放り投げた。他の弟たちが日本兵に向かって噛み付いたり、服を引っ張ったり、足にしがみついたりして、母を守ろうとしたが、日本兵は、その三人の子供を銃剣で突き刺した。父はこのとき9歳だった。父は気を失った。父の姉も何度か銃剣で刺され、気を失った。
二人が目を覚まし、小来来を母の胸元に抱かせ、乳を飲ませようとしたが、母は次第に目を閉じていった。また父の父は、拳銃で背中を撃たれて死んでいた。
翌日父と姉は中年の女性に助けられた。彼女を「太ったママ」と呼んだ。張という人だった。殺された彼女の夫は演劇の役者だった。日本兵が入ってきて、太ったママに歌を歌わせた後、彼女と父の姉を強姦した。父の姉はそのとき11歳だった。
三人で金陵大学に逃げた。20万人の難民がいた。その後二人は優しい夫婦に出会った。夫は姜阿州と言い、二人を引き取って育ててくれた。
難民は運動場へ追いやられ、男の群れと女と子供の群れとに分けられた。日本軍は、男の中から一人を引っ張り出し、その人に知人がいなければ、縄で縛って集団虐殺した。
難民区が解散すると、一人の知人が現れ、二人を家に連れ帰り、父の祖母と曾祖母に会えた。父と姉は王府園へ行き、家族の死体を捜した。王府園の人は、母親にしがみついたまま凍死した子供がいたこと、その母子を離すことができなかったことなどを話してくれた。
祖父は39歳で犠牲者になり、祖母は30歳だった。私の大叔父は8歳、二番目が6歳、三番目が4歳、四番目は2歳になっていなかった。
父の姉は日本人が経営する被服工場で長時間働き、父は柴を刈り、野菜を掘り、炊事をした。油条(中華風長揚げパン)や焼餅(中華風焼餅)を売り歩き、米を買って来て売った。日本兵は米を袋ごと水につけ、売ることも貯蔵することもできないようにした。
1938年から1940年にかけて米価が4倍になった。1942年に日本の偽政府は配給を始めたが、それだけでは不足だった。老人や子供は並んでも米を買えなかった。

昼に米を買いに行き、夜城に戻る。
少年は数十里も歩く。
勇気を出して墓地を抜け、
生きるために両肩を腫らして、

1943年から1944年にかけて、南京では多くの人が流行性の疫病にかかった。当時は日本軍がばらまいた細菌の毒によるものだとは知らなかった。当時日本軍第1644部隊の本部が、南京城内中山東路北側にあった。元は陸軍中央病院だったところだ。細菌武器と毒ガス武器の実験がここで行われていた。当時明故宮空港から飛び立つ飛行機から、よく一種の霧状のものが撒かれていて、まもなく疫病が蔓延した。父と父の姉は時々明故宮空港の付近で草刈をした。ある日草刈に行った姉が、突然高熱を出した。高熱は7日7晩引かず、身体中斑点だらけになった。医者は発疹チフスと診断した。姉はなくなった。
 今日侵華日軍南京大虐殺遭遇同胞起念館の彫像広場に、乳飲み子を抱いたまま横たわっている母親とそれを脇で見る子の彫像「最後の一滴の乳」がある。私の父の母と父の末の弟と父の像である。

現在父は、幼い頃住んでいた南京夫子廟と、自分の家族の受難の光景がある南京大虐殺遭難同胞記念館によく足を運んでいる。
父は今絵を描くのが好きだ。

南京大虐殺の惨劇は中国人民にとって、心を切り裂くような歴史の一ページである。このことは私たちの努力によって、世の中の人たちに警告しなければならない。歴史を教訓とし、今日の平和を尊び、悪魔のような戦争から遠ざからないといけない。中日両国民の友好が何代も続きますように。

以上 2019年9月30日(月)

2019年9月30日月曜日

「南京大虐殺」の前史としての「東京(関東)大虐殺」木野村間一郎 要旨・抜粋・感想


「南京大虐殺」の前史としての「東京(関東)大虐殺」木野村間一郎 ノーモア南京の会、関東大震災中国人受難者を追悼する会
これは2018年11月27日、南京で行われた「『歴史・平和・発展』‐多元的な視野から見た日本の中国侵略及び南京の研究」学術シンポジウム資料である。

(1)はじめに
055 2018年9月8日、東京荒川河川敷で行われた追悼式に、韓国から2名の遺族が参加し、中国から参加した遺族5名と固く握手を交わした。

(2)日本の対外戦争と差別意識
056 日本は明治維新以後関東大震災までの間に、日清(甲午・乙未)戦争に始まり、日露戦争、第一次大戦、シベリア出兵など、殆ど10年毎に侵略戦争を体験してきた。その侵略戦争には日本全国の部隊が総力戦として動員され、国民=臣民意識が形成されてきた。
 明治維新以後最初に行われた日本の日清戦争は、勝利続きの戦争でも、国際法を守った戦争でも、武士道に基づく礼儀を重んずる道徳的な戦争(『武士道』新渡戸稲造、1899年英文版)でもなかった。宣戦布告なき奇襲に始まり、手当たり次第に村々を焼き払い、圧倒的な軍事力をもって、抵抗する住民の大虐殺を繰り返した。また、現地調達という名の略奪は、すでに帝国陸軍の基本方針であった。
 日清戦争には32万5千人が従軍した(当時の人口は4100万人)。日本国内では、第1軍(司令官山県有朋大将)の戦勝で日清戦争が語られるが、実は、遼東半島制圧にむけた第2軍(大山巌大将)が、後の南京大虐殺を彷彿とさせる旅順大虐殺を行ったことは語られない。この部隊は第1師団(山地中将)配下の歩兵第1旅団(乃木希典少将)以下関東の部隊を中心に構成され、他に小倉・福岡など九州の部隊も参加した。
 日本は、8月1日の清国に対する宣戦布告前の7月23日、朝鮮王宮を襲撃し、朝鮮政府に清国軍駆逐依頼と兵站確保の公文を強要したが、拒否され、合意のないまま、兵站線に関わる各地で朝鮮民衆の執拗な抵抗に直面した。東学農民革命運動は1894年2月の全羅道古阜蜂起以来、朝鮮政府を追い詰め、6月には、全州和約を勝ち取っていた。日本軍は農民軍に対して鎮圧軍を出し、北は平壌から、また首都漢城(現ソウル)から南は、東、中、西路3方面に分けて攻撃し、釜山、珍島*、済州島まで追撃し、1895年2月まで虐殺を続けた。3万人から5万人といわれる大量虐殺を強行した。これに従事したのは、四国を中心とする後備兵歩兵独立第19大隊(大隊長南小四郎)などであった。
*珍島とは、韓国南西部の島で、韓国で三番目に大きな島。
 1895年4月、馬関条約*で台湾、澎湖諸島等が日本に割譲されると、そのまま5月に始まった台湾侵略戦争では、1896年にかけて、北から南に全土で村々を焼き尽くし、2万民衆の大虐殺を行った。
*馬関とは下関の旧称である赤間関の俗称。赤馬関とも書かれたところからこう呼ばれた。
057 これには近衛師団、第2師団(仙台、師団長乃木希典)を中心に7万6千人が参加した。戦死者276人と少ないものの、病死者4642人、病院に収容された者2万7千人と困難な戦いであった。この戦争は1902年の帰順式におけるだまし討ちの大虐殺まで続いた。
 しかし、日本国内では、こうした朝鮮、中国における住民虐殺の事実はほとんど伝えられず、日清戦争は勝利に継ぐ勝利と思い込み、国民は沸きあがり、総力戦を牽引した天皇の権威は高まった。戦争が始まると共に、義捐金献納運動が起き、戦場に大勢の従軍記者が参加し、新聞社は号外合戦で、戦場の様子を伝えた。忠勇美談が作り上げられ、芝居に、本に、錦絵になった。そして盛大な凱旋式典が行われ、各地に記念碑が建てられた。
 こうして、明治維新以後最初の戦争で、国民は自らが一兵卒として戦争に参加し、国内ではそれを全国民が支え、戦場意識を共有し、朝鮮、中国に対する差別意識を拡大し、大量虐殺を当然視した。その結果、「勝利」という経験を通して、「無知で野蛮な朝鮮人、中国人と勇敢で崇高な日本兵」「遅れた朝鮮、中国とアジアの優等国日本」の「日本国民」として一体化し、天皇制国家の一員(臣民)としての帰属意識を強めていった。歴史的に畏怖を抱いてきた中国に対する感情は逆転した。この日本人の意識転換、この時の国民感情がその後の歴史の基礎を作ったといってもよい。
 日清戦争の大本営は1896年4月1日の解散まで続いた。日清戦争は、甲午・乙未(丙申)戦争であり、朝鮮半島、遼東半島、台湾を蹂躙しつくし占領した戦争だった。日本は1894年11月21日旅順陥落をもって「清国恐るるに足りず」として、翌年1895年1月14日、釣魚台略奪*を閣議決定した。これは戦時体制下の決定であり、略奪というほかない。
*釣魚台とは、尖閣諸島の台湾名

 日清戦争後師団が増設され、それまでの平時7個師団から1896年に平時13個師団(平時16万人、戦時54万人)にまで拡大した。第7(旭川)、第8(弘前)、第9(金沢)、第10(姫路)、第11(善通寺*)、第12(久留米)を増設。歩兵連隊は48となり、いわゆる「郷土部隊」となった。地域末端からの戦争動員体制の基礎ができたのである。
*善通寺は香川県
 1899年、義和団が蜂起し、1901年、清国と諸列強11カ国との間で辛丑条約*が調印され、日本軍による中国駐留が開始されたが、このことはその後重要な意味をもった。
*北京議定書
058 日露戦争で日本軍戦死者8万4千人、戦傷者14万3千人(ロシア軍戦死者5万人、戦傷者22万人)を出した。東京歩兵第1連隊は第2軍として金州南山*の激戦で戦死者が相次ぎ、その後第3軍(司令官・乃木希典)に編入され、旅順攻略で7ヶ月に渡る大苦戦し、大量の戦死者を出した。日本国内では勝利と言われたものの、兵士の実感はそうではなかった。
*金州南山とは遼東半島・金州城の南近郊の南山というところ。ここで1904年に日露戦争が行われ、日本側は、総兵力の10%を超える兵員を失った。
 日露戦争の鬱積した不満は、講和条約に対する日比谷焼き討ち事件として爆発した。
 朝鮮では、日露戦争の最中に、1904年第一次日韓協約、1905年第二次日韓協約(韓国保護条約)、1907年第三次日韓協約が締結され、ついに1910年韓国併合となった。
 日本は1905年1月、ロシアバルチック艦隊との日本海海戦のために、独島の日本編入を閣議決定した。
 1911年辛亥革命が起き、1915年、第一次大戦を横目に、対華21か条要求を押し付けた。
 台湾も理蕃事業5ヵ年計画*に対する抵抗闘争が激化し、1915年、西来庵事件*が起きた。

*理蕃事業5ヵ年計画 山岳先住民族=「蕃地に住む蕃人」に対する政策。第4代総督・児玉源太郎は「野生禽獣に斉しい蕃人は、誘導などの緩慢な手段でなく、いきおい絶滅させる」という政策を構想したが、第5代総督佐久間左馬太は五ヵ年理蕃計画を立て、蕃人を帰順させ、利用しようとする方策を取った。
*西来庵事件 1915年、台南庁の噍吧哖(タパニー、現・玉井)で起こった武装蜂起に対してジェノサイド的弾圧が行われたが、その後も地下運動が日本の敗戦まで続いた。

 第一世界大戦では、1914年9月、山東半島上陸、11月、青島陥落、日本国内では提灯行列が行われたが、「工業のために犠牲になった女工の数は、日露戦争の死傷者数に匹敵するほど多い」と言われるほど、貧困と都市問題が発生し、農村の疲弊も進んだ。
 1917年ロシア革命に対して、1918年シベリア出兵(1922年までに7万3千人を派兵)を起こすが、3500名の死者を出す。1920年の尼港事件*では700人の死亡者と120人余の捕虜を出した。

*尼港事件 1920年3月から5月にかけてアムール川河口ニコラエフスク(尼港)で発生。2月、尼港を占領中の日本軍は、ソ連軍の攻撃を受け降伏し、将兵と居留民は捕虜となった。5月25日、日本側が反撃すると、ソ連側は351名の将兵、副領事を含む383名の日本居留民を殺害し、市内を焼き払って逃亡した。ソ連は事件責任者を死刑にした。日本はソ連が責任を認めないので、交渉相手国不在を理由に、北樺太サガレン州の主要地点を保障占領したが、1925年、日ソ基本条約付属公文で、ソ連が遺憾の意を表明したため、日本側は保障占領を解除した。(コトバンク)

 かくして日本社会は、常に臨戦態勢の下に、10年毎に朝鮮人、中国人を虐殺し続け、10歳ごとに侵略戦争を体験・記憶し、朝鮮人・中国人に対する差別意識・排外意識と虐殺の経験を蓄積してきた。

(3)戒厳令及び軍隊の動きと民衆動員
 軍・警察がまず流言を流し、あるいは意図的に流言を利用・拡大し、次には虐殺の模範を示し、虐殺をそそのかし、そして今度は9月4日に、自警団取締令を出し、自警団を取り締まるそぶりを見せて、自らの責任を回避しようとした。
大虐殺は戒厳令の下で行われ、家族、地域、国家挙げてのものとなり、将来の国民総動員への転換点となった。
 戒厳令は、軍事独裁である。戒厳令は、擬似戦時体制を作り出し、憲法を停止し、議会を破壊し、国民の権利を大幅に制限する。
 日本の戒厳令は、1882年、軍人勅諭、徴発令とともに制定され、1889年、憲法第4条で「天皇が戒厳を宣告す」とされた。
 戒厳令には二種あり、軍事戒厳の宣告と行政戒厳とがあるようだ。
 前者は日清戦争中に1件、日露戦争中に6件行われ、これは臨戦地境(戦時もしくは事変に際し警戒すべき地方を区画)としての戒厳宣言であり、後者は、その後行われたもので、国内の特定地域における緊急の軍事的制圧を目的としたもので、これは3度宣告された。第1回は1905年9月6日で、講和条約反対・日比谷焼討事件、即ち9・5民衆暴動である。第2回は、関東大震災、第3回は2・26事件である。
 日比谷焼討事件を契機として、軍隊は、対外的なものではなく、国民民衆に対する治安部隊としての性格を露骨にし始めた。また1918年、米騒動の時には戒厳令は宣告されなかったが、軍隊は各地で治安活動に当たり、民衆に発砲し、殺傷事件を起こした。
 関東大震災時の戒厳宣言は、山本内閣成立直前に、枢密院の諮詢を経ることなく緊急勅令によってなされ、手続き上違法性がある。これまでに戒厳令がなくても弾圧を担ってきた官僚と軍隊は、すでに動いていた。
 9月1日、災害が起こると、東京衛戍(じゅ)司令官代理・陸軍中将・石光真臣(まおみ)第1師団長は、直ちに近衛師団(師団長・騎兵陸軍中将・森岡守成(もりしげ)・東京)と、第1師団に、全都の警備に当たらせた。在京部隊だけでは処理できなかったので、陸軍当局は、憲兵隊(憲兵司令官・陸軍少将小泉六一)に補助憲兵を増加し、当面、東京以外に駐屯していた部隊を招致し、森岡の指揮下に編入した。
 9月2日、戒厳宣言がなされ、東京市とその周辺の5郡に戒厳令第9条と第14条が布告された。
060 3日、東京府と神奈川県に戒厳地境を拡大し、関東戒厳司令部を特設し、軍事参事官・陸軍大将・福田雅太郎を戒厳司令官に任用した。
 4日、埼玉・千葉両県に布告を拡大した。
 2日、治安当局中枢部の内務省警保局長が、「朝鮮人が暴動を起こした」と認定した。
 さらに軍隊が増派された。第13師団(井戸川辰三・仙台)、第14師団(長坂研介・仙台)、第8師団(小野寺重太郎・弘前)、第9師団(星野庄三郎・金沢)、第13師団と第14師団の工兵大隊である。
 大江志乃夫『戒厳令』岩波新書1978によれば、この「戦時特命の軍司令官要員である軍事参事官(福田雅太郎)を戒厳司令官に任用したことは、隷下の軍隊に戦時気分を高揚させた。」
 福田は第14条による人権制限を決定し、その「第4項、各要所に検問所を設け、通行人の、時勢に妨害ありと認める者の出入禁止、又は時機により水陸の通路停止」を拡大解釈し、告諭を発し、「この際、地方諸団体及び一般人士もまた極力自衛協同の実を発して、災害の防止に努められんことを望む」とし、軍隊・警察の下に自警団を取り込み、朝鮮人・中国人・社会主義者に対する検問・拘留の根拠とした。
 内務省は米騒動のときにすでに暴動対策として、各市町村に、在郷軍人分会と青年会を中心に自警組織をつくるよう行政指導していたが、関東大震災時には、自然発生的なものも含め、自警団が膨大に組織された。
 9月3日、関東戒厳司令官の福田は、戒厳地域を、東京北部(近衛師団など)、東京南部(第1師団など)、神奈川、小田原の4警備地区に分けて軍隊を配置し、結局、9月10日までに配置された部隊は、東京憲兵隊、歩兵59大隊、騎兵6連隊、砲兵6連隊、騎砲兵1大隊で、計人員5万2000人、馬9700頭であった。
 軍隊による兵器使用が解禁され、軍隊による検問、令状なしの検察、自警団への指導がなされ、軍による虐殺もあった。
 第1師団騎兵第16連隊の見習士官越中谷利一は、所属する習志野騎兵連隊が出動したとき、「戦時気分で無差別に列車を検察し、朝鮮人を拘引し、兵器で大量の虐殺をした」と回想している。(『現代史資料6』)
 日本政府・安倍晋三政権は「記録が見当たらない」としているが、軍隊による武器の使用があったとする資料が残されている。関東戒厳司令部詳報第三巻第四章第三節付録付表「震災後警備のため兵器を使用せる事件調査表」によれば、「第1師団の野戦重砲第1連隊と近衛師団騎兵第14連隊」(野重1の岩波清貞少尉以下69名と騎14の三浦孝三少尉以下11名)は、群衆及び警官4、50名が連行した朝鮮人200名を全部殺害した。ただし、この朝鮮人は中国人だった可能性があるが、軍隊側は「朝鮮人と確信している」と、中国人であることを知りつつ、国際問題になることを恐れて、事実を隠蔽しようとした。
061 このように軍隊の出動は、民衆を、不安や恐怖から朝鮮人・中国人虐殺へと向かわせる役割を果たした。戒厳令布告は、市民を悉く敵前勤務の心理状態にし、「天下晴れての人殺し」の意味を持った。巡査は「朝鮮人と見れば打ち殺してもよい」と告げ、民衆は「朝鮮人を捕らえれば、金鵄勲章をもらえる」と思い込んでいた。
 つまり、戦場心理と、国家(天皇)の名による敵殲滅と、報償とが一体化していたのだ。さらに朝鮮民衆の3・1独立運動に対する弾圧を思い出し、それが虐殺に転化し、「正義としての敵殲滅=虐殺」を引き起こした。戒厳令による「今回の震災による戒厳を、事変による戒厳と看做し、かつその戒厳区域を臨戦地境と看做し、敵国が国内に乱入したような」(津野田少将(藤井忠俊『在郷軍人会』岩波書店2009))状況が生じた。
 この戒厳令を推進したのが、警視総監赤池濃と内務大臣水野錬太郎のコンビであった。水野は1918年の米騒動時の内相で、1919年には朝鮮総督府政務総監であり、このとき赤家は朝鮮総督府警務局長であり、二人そろって3・1独立運動を弾圧していた。
 関東大震災時の第1師団長で衛戍司令官代行の石光真臣は、米騒動時の憲兵司令官であり、1919年には朝鮮憲兵司令官であった。
062 1919年9月2日、斉藤実は朝鮮総督として着任したが、南大門駅(現ソウル駅)で独立運動家姜宇奎に爆弾を投げつけられ、水野もこのとき現場にいた。現在、姜宇奎の銅像がソウル駅前にある。一方東京駅丸の内駅前広場には、巣鴨拘置所の教誨師であった田嶋高純らによる、BC級戦犯を追悼する「愛(アガペー)の像」がある。

(4)在郷軍人会並びに自警団、青年団
 日本の古くからの五人組は、相互扶助が謳われていたが、実は領主の命令で組織された隣保制度であり、連帯責任、相互監視を本質とする。戦時体制は、人権を制限するから、治安当局の補助機関として下から支える組織が必要とされる。それが、国防婦人会、在郷軍人会、町内会である。
 山田昭次は『関東大震災時の朝鮮人虐殺とその後』創史社、2011の中で、自警団の発生経緯を次の四つに分類した。第一に夜警団から生じた自警団、第二に、最初から朝鮮人対策の自警団としてスタートした自警団。第三に、官憲の命令でつくられた自警団。第四に、警察署が下請けの治安組織として有力者を介して町会を組織してつくった自警団である。
 いずれも地域の有力者を中心とするものであり、自然発生的ではなく、愛国精神=臣民意識を中心とした治安補助機関である。
 在郷軍人会は1910年に作られた。帝国在郷軍人会は、退役軍人の共済会ではない。満20歳になると徴兵される。3年間の現役を退役後、4年4ヶ月の予備役、10年の後備役が義務づけられ、その間、勤務演習、簡閲点呼等軍事的義務を課され、一方で、連隊区司令部=市町村役場兵事掛、在郷軍人会等を通じて、日常的な監視・監督の下に置かれ、戦時は召集されることがある。補充兵(現役選抜にもれた者)は、現役に欠員が生じたとき、および戦時に召集される。服役年限は、12年4ヶ月。
在郷軍人とは、この予備役・後備役・補充兵役にある者と、40歳までの国民兵役の者のことである。(藤井忠俊「関東大震災と在郷軍人会」季刊『現代史』9号1978)
 田中義一は、総力戦体制構築を常に念頭に置き、日露戦争の教訓から、予備役、後備役の役目に目をつけ、在郷軍人を重視していた。
063 在郷軍人会は、平時に常時組織され、軍の統制下にあり、訓練されなければならない。そのために全国市町村に分会をつくり、青年会との関係も重視し、青年団と在郷軍人会とが直結した。
 米騒動や20年代の社会運動のとき、在郷軍人会に動揺が起こったが、このとき、関東大震災が起こり、それ以前に青年団、現役、在郷軍人会として40歳までの男が、日常的に軍の支配下に置かれていたことの意味は大きい。
 関東大震災時に、在郷軍人会は、警察の次の、軍を支える組織となり、自警団が総力戦体制を地域から支えるための中核組織となった。
 清浦内閣から、加藤内閣、若槻内閣を通して陸相を勤めた宇垣一成は、関東大震災から教訓を得て、20余万の現役軍人、300余万の在郷軍人、5、60万人の中上級学生、千余万の青少年を軍部が掌握するという組織化を考えた。(『宇垣一成日記』1925)
 地域の監視体制のもと、男は自警団に駆り出され、女は銃後を守り、子供は目の前で虐殺を目にして育った。こうして地域防衛、生活防衛、国防意識が一体化し、差別排外意識が根を張った。

(5)ファシズムへの転換点としての関東大震災(国民=臣民意識の動揺と再統合)
 日清戦争の「勝利」に日本国民は興奮したが、日露戦争、シベリア出兵で、兵士は疲弊し、軍人に対する畏敬の念は衰退し、「国民=皇国臣民意識」は揺らぎ始めた。
 明治政府は危機のたびに天皇制イデオロギーを国民統合の手段に用いた。大日本帝国憲法発布の翌年、1890年、教育勅語を出し、日露戦争後の1908年、戊申詔書*を出し、「社会主義のような危険思想」への接近を戒め、天皇主義の下での「国民の精神生活」を指導した。また関東大震災後、19223年11月10日、「国民精神作興に関する詔書」*を出し、思想統制を強めた。

*戊申詔書は国民道徳の標準を示し、その後、地方改良運動が始まった。「上下心を一にし、忠実業に服し、勤倹産を治め、惟れ信惟れ義、醇厚俗を成し、華を去り、実に就き、荒怠相戒め、自彊息まざるべし」

*「国民精神作興に関する詔書」は個人主義、民主主義、社会主義の台頭に対処するために出された。
「朕惟うに国家興隆の本は国民の精神の剛健に在り、之を涵養し之を振作して、以て国本を固くせざるべからず。是を以て先帝、意を教育に留めせられ、国体に基づき淵源に遡り皇祖皇宗の遺訓を掲げて、その大綱を昭示したまい、後また臣民に詔して、忠実勤倹を勤め、信義の訓を申ねて、荒怠の誠を垂れたまえり。…」

 1918年、米騒動が起き、普選運動、労働運動、農民運動、共産主義運動、部落解放運動が展開され、1923年の春、三悪法(過激社会運動取締法案・労働組合法案・小作争議調停法案)反対運動となった。
 1919年、朝鮮では3・1独立蜂起、中国では、5・4運動や日貨排斥運動が起こった。
064 1920年代、朝鮮での産米増産計画のため、朝鮮人の日本への渡航者が増え、戦後恐慌で失業者も増えた。日本人労働者は朝鮮人や中国人に仕事を奪われるのではないかと畏れ、それが震災時の虐殺につながった。
 東京の亀戸・大島に多くの虐殺が集中したのは、この地域に多くの朝鮮人・中国人が住み、社会主義的労働運動の拠点と当局に目をつけられていたからだった。
 1920年、日本で最初のメーデーが行われ、1921年、神戸市にある川崎造船所3工場と三菱3社の労働者3万人による大争議*に発展したが、資本・権力が弾圧した。
*川崎・三菱神戸造船所大争議は、第二次大戦前の日本最大のストライキ。
 1921年10月、日本農民組合が成立し、1922年、全国水平社が創立され、また日本共産党が秘密裏に結成された。
 メーデーでは日朝労働者の団結が始まり、コミンテルンの影響もあった。
 植民地支配を必須と考えていた支配階級は、日朝、日中の労働者の団結は脅威であり、「国民=天皇の軍隊」よりも「労働者の国際連帯」が意識されるようになることを恐れていた。このような状況の中で発生した関東大震災時に、朝鮮人や中国人の大虐殺と、社会主義者の虐殺が行われ、日朝・日中労働者の連携をつぶした。関東大震災は支配層にとって、戦争へ向けた統治体制への転換点となった。
 9月1日前後は内務省と警察にとって警戒を要する状況にあった。
第一に、8月23日、加藤友三郎首相が病死し、26日、内閣総辞職、28日、山本権兵衛に組閣の大命降下という政情不安があった。
第二に、日本共産青年同盟が、9月第一日曜日(9月2日)の国際青年デーを準備しており、さらに8月29日が日韓併合の屈辱の日にあたり、内務省は「一派の者が二百十日(9月1日)前後に不穏計画を実行せんとする」と警戒していた。
第三に、9月1日に山本が組閣を完了し、親任式を行う予定で、赤坂離宮にいた摂政裕仁は、宮城に向かい、親任式後、箱根に避暑に行く予定であった。そのため摂政の行還啓に伴う沿道の警備のため、要視察人の予防検束が予定されていた。
 関東大震災のあった、1923年のメーデーでは「植民地の解放」を取り上げることが決定されていたが、当日、官憲の弾圧でつぶされ、日本人社会主義者70名、朝鮮人労働者50名、日本人労働者150名が検束された。当局にとって朝鮮における抗日独立運動、中国の反日運動、日本の労働運動の高揚と連帯は、破壊しなければならない対象となっていた。
065 日本の民衆運動は、関東大震災で大虐殺に動員され、民族排外主義に屈してしまった。

(6)関東大震災大虐殺から南京大虐殺へ
 1924年5月、当時の清浦内閣は関東大震災時の中国人虐殺に関する賠償を決定し、1925年6月、中国との交渉に入ったが、「時局のため」中断した。
 1925年、社会運動取締のために、治安維持法が成立した。 
 1926年、日本国内の内政が混乱し、年末に天皇が代替わりし、1927年、若槻礼次郎内閣が倒れ、1927年4月、陸軍大将だった田中義一内閣が誕生した。
 田中義一は、一貫して国民総動員体制の構築を考え、「国民を国家の政策に動員し、強固な国家への支持を取り付け」「この難局を打開するためには、国家の総動員をなして、生産の増加を計り、内は生活の安定を得、外は国運の発展を求め」、「この意味を国民がよく了解し、初めて経済、産業、教育、その他、あらゆる事項に努力し、国家観念・皇室観念が王制となる」と考えていた。
 田中は外相を兼任し、外務政務次官は、幣原外交を批判してきた、徹底的な帝国主義者の森恪(つとむ)であり、内務大臣は、大日本国粋会顧問の鈴木喜三郎であった。
 1927年5月、第一次三東出兵、
1928年4月、第二次三東出兵、斉南事件、
1928年5月、第三次山東出兵、
1928年6月、張作爆殺事件、
1931年9月、9・18事件、
以後、昭和の天皇制ファシズムの時代へ進んだ。
 関東大震災の朝鮮人・中国人虐殺に関する現日本政府の答弁書は、一貫して「資料がない」と事実を覆い隠そうとしている。資料は沢山あるし、政府の防災会議のホームページには、大虐殺を調査している研究者の資料を紹介している。日本政府は「あって欲しくないことは、なかったことにする」という態度である。
 かつての政府は隠蔽工作をしていた。中国人虐殺に関して、1923年11月7日、五大臣会議(総理山本権兵衛、内務後藤新平、外務伊集院彦吉、司法平沼騏一郎、陸軍田中義一)によって隠蔽された政府資料(11月8日亜細亜局長口述『王希天問題及び大島町事件善後策決定の顛末』)に示されている。
066 現在、東京都都知事小池百合子は、右翼の排外主義的な言動と呼応し、昨年2017から関東大震災朝鮮人犠牲者追悼式への追悼文送付を取りやめ、関東大震災時の朝鮮人虐殺の歴史を曖昧にし、否定しようとしている。日本では、アパホテルのように南京大虐殺を否定する動きは止まず、2018年10月の安倍改造内閣の柴山昌彦文科相のように、教育勅語を賛美する政治家が絶えない。

以上  2019年9月30日(月)



菊池事件パンフレット 菊池事件再審弁護団、菊池事件国民的再審請求人団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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